로제타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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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arbfl0204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12월 24일 (토) 05: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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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로제타 석("Rosetta Stone" by © Hans Hillewaert. Licensed under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 기간 동안 로제타 근처에서 쥴리앙 요새의 기초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1799년 7월, 공병 부관 부샤르는 상형문자, 민용문자 그리고 그리스어가 새겨진 커다란 돌을 발견하는데, 이 돌은 본래 신전 경내에 있다가 요새를 만드는 데 다시 사용된 것이었다. 돌의 가운데 부분 문장은 곧바로 상형문자의 초서체라는 가능성이 제시되었고, 상형문자 해독에 도움이 되는 유물로 여겨졌다. 실제로 그리스어로 씌어진 문장은 샹폴리옹이 이집트 문자를 해독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샹폴리옹은 원본을 보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1801년 이집트에 있던 프랑스 군대가 항복함에 따라 로제타석이 영국인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이 돌은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검은 현무암으로 된 이 돌의 기원은 원래 로제타가 아니라 나일 강의 델타 지류에 위치한 도시인 사이스의 신전이었다. 원문에 따르면 이 돌은 신전 안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조상 근처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재위 4년(기원전 196. 3. 27)에 만들어진 멤피스 법령을 옮겨쓴 것으로, 나라 안의 다른 신전에 있던 여러 판본들도 현재까지 남아 있다. 당시 멤피스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 모인 나라 전역에서 온 사제들은 세금의 면제와 감면, 신성 동물에 대한 예우, 신전의 완공, 반란의 진압 등 왕의 공덕과 왕이 국가와 특히 신전에 베푼 은혜를 찬양했다.

멤피스 법령은 카노푸스 법령처럼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전형적인 것으로, 이집트 성직자와 라지드 왕조 사이의 연루 및 협력 관계를 보여준다. 이집트 성직자는 신전들 안에 왕의 조상을 건립할 것을 결정했고 왕을 기리기 위한 축제를 주관했다.

발굴 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56km 떨어진 로제타(Rosetta)지역의 성 줄리언요새(Fort St. Julien)에서 진지를 구축하던 프랑스군인들이 폐허가 된 옛 성을 헐어내는 중에 1799년 8월 석판형태의 돌비석을 발견하게 되었다.9) 그 크기는 길이가 3피트 9인치고 넓이가 2피트 4.5인치이며 두께가 11인치였다. 발견 당시 비석 상단부의 좌우와 우측하단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작업군인들이 혹시나 떨어져나간 조각을 찾을 희망으로 인근구역은 조사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들은 이 흑색 현무암(black basalt)비석을 조심스러이 포장하여 카이로에 있는 프랑스학자들의 임시 연구소로 수송했다. 종군 학자들이 관찰해본 결과 이 비석이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문자가 함께 있는 첫 비석이었기에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일단 학자들은 이 돌을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로제타 스톤(Pierre de Rosette)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이 비문을 잉크및 석회로 된 탁본을 떠서 프랑스에 있는 그리스어 전문가에게 보내서 번역을 하게 했다.
이러한 와중에 1801년 봄 영국군이 알렉산드리아 근처에 상륙했고 오토만 원정군이 시리아를 거쳐서 이집트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해 6월 카이로는 오토만군에 함락되고 프랑스군은 알렉산드리아로 후퇴했다. 이들은 후퇴하면서 그 동안 이집트에서 수집했던 모든 유물들과 함께 로제타 비석도 가지고 갔다. 영국군에 포위된 프랑스군은 그해 9월 영국군에 항복했다. 항복협정의 한 조건으로 영국군은 그 동안 프랑스학자들이 수집한 이집트의 유물들을 모두 그들에게 인도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프랑스학자들은 강력히 반대했고, 특히 프랑스군 총 책임자인 메노우(Gen. Menouw) 장군은 로제타 스톤은 그의 개인적 소유라고 주장했다. 오랜 시간의 협상 후 절충적인 해결방법으로, 프랑스학자들이 많은 부분의 유물을 소유하는 대신 로제타 스톤은 영국군에 인계되었다.

해독 과정

프랑스의 학자들은 이집트에서 보내온 로제타 스톤의 탁본을 이용해 그리스어 비문을 번역했다. 그리스어의 변역에 의하면 이 비석의 비문은 하나의 포고령으로서 알렉산더 대왕 사망이후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프톨레미 왕조의 프톨레미 5세(Ptolemy V, Epiphanes, 203-181 B.C.)의 치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당시 12세인 프톨레미 5세의 통치 6년째인 기원전 196년에 멤피스(Memphis)의 프타흐(Ptah) 신전에 집결한 이집트의 모든 성직자들의 모임에서 결정된 그의 치적들을 기록한 것이다. 비문은 그리스어로 먼저 쓰고 그것을 이집트 고대 그림문자와 그의 필기체로 번역을 한 것을 한 비석에 옮겨놓은 것이다.10) 비문의 주요내용은 그의 6년 동안의 재임기간에 선왕 프톨레미 4세의 실정을 극복하고 반란을 진압했고 나아가 육군과 해군의 전력증강을 위하여 많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죄수들을 석방하고 군인들에게 푸짐한 하사금을 내리고 법과 질서를 바로 잡았다는 칭송과 과거의 종교적인 행사를 부활했고 성직자들의 특권과 재정적 특혜를 복원시켰다는 내용 이다. 그 결의에 의하면 이러한 비석을 그 당시 이집트에 있는 1등, 2등, 3등 신전 모두에 건립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문장에는 이 포고령을 비석에 먼저 이집트 그림문자로 기록하고 다음은 이집트 토속문자인 데모틱(demotic)으로 마지막으로 그리스어로 기록한다라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어 비문의 해독은 그 당시 학계에 이집트문자의 해독의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스문자를 해독한 후 학자들은 다음으로 이집트 문자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는 고대 그림문자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들을 연결해서 쓰는 다른 글씨인 것 같았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로제타 스톤은 3개의 다른 글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추후 토마스 영(Thomas Young)에 의해서 밝혀지지만 토속문자는 그림문자를 간소화하여 연결해서 쓰는 같은 글이었다. 그 리스어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학자들은 이집트문자들이 그리스어 내용과 동일한 내용일 것이라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추측을 할 뿐 누구도 이집트문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다. 그후 많은 학자들에 의한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 고대 이집트그림문자가 발음을 나타내는 알파벳의 원리에 의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해독이 가능해졌다.

약탈의 역사

참고문헌

  • 창해 편집부, 『ABC북 맛보기 사전』, 도서출판상해, 2012, 6.
  • 박찬기,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과 이집트 알파벳」, 韓國中東學會, 2004, 235-262
  • 손주영, 송경근, 『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