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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7일 (화) 10:13 판

측천무후
則天武后

본명 무조(武曌)
출생 호북성(湖北省)
별칭 아명(兒名)은 무미랑(武媚娘), 무조(武照)
종교 불교

측천무후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의 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이라 부르기도 한다.(이하, 무측천)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로 그녀의 재위 기간 15년이다. 고종은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반대가 있자 반대하는 이들을 죽이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운다.
무측천은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한 종실 제왕 및 대신들의 반대를 무측천은 혹리의 임용과 엄형준법으로 탄압한다.
690년 무측천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주로 바꾼뒤 동도인 낙을 신도로 삼는다. 무측천의 통치 시기는 당 태종의 통치 시기인 정관의 치와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으며, 무주의 치라고 불린다. 705년 무측천의 병세가 악화되자 일부 대신이 당 중종의 복벽을 감행하고 무주의 통치가 종언을 고하게 된다.

업적

무측천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사실상 유일한 여성 황제이다. 한의 여후(呂后)나 청의 서태후(西太后)처럼 황제의 실권을 차지했던 여성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계속 황후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에 비해 무측천은 제1의 실권자 자리를 차지하고 스스로 황제자리에 군림했다. 또한 그녀의 통치기간은 태종이 통치하던 정권의 치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의 치 라고 불리며, 이후 당의 전성기인 현종 때의 개원의 치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단 그녀는 올바른 인재등용에 힘썼다. 그녀는 자신의 강력한 권력으로 자신에게 반대하던 장손무기,저수량 등의 대신들을 변방으로 쫓아냈는데, 이는 사회 발달 저해의 원인이었던 관농 귀족들을 당의 정치무대에서 내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과거제도를 정비하여 훨씬 더 능력 있는 인재들을 정치무대로 끌어들였다.
한 예로, 측천이 시행한 과거제에서 27명의 사람이 등용되었는데 그 중 단 3명만이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녀의 과거제가 얼마나 공정히 이루어졌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그녀의 시대동안만 유일하게 여성도 과거제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녀는 자신의 정치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그 과정에서 공포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잔인한 여자황제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통치 기간 중에는 문화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그녀의 통치기간동안 380만호였던 인구가 615만호로 증가하였는데, 평균적으로 매년 9.1%의 증가를 보이는 비약적인 수준이 발전이었다. 또한 불교의 통치철학과 진흥책을 펼쳐 중국 불교 문화의 꽃을 피워 문화적으로도 큰 발전을 보여주었다.

평가

무측천은 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이라는 칭송을 동시에 받고 있다.
만약 그녀가 남자였다면 태종이나 현종 같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 평가는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기인하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녀의 통치는 너무나 잔인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활이 너무 음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만큼 잔인하지 않은 황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녀의 잔인함은 훨씬 더 부각되었다. 음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여자와만 잠을 잔 황제가 얼마나 있단 말인가? 음란함 역시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에 대해서 섣불리 부정적인 평가들을 내리기 전에 그런 부정적 평가들이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1]

각주

  1. 陳聞鶯,한국 선덕여왕과 중국 측천여황제의 정치적 면모와 인간상 비교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