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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개혁과 라사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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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개혁'''==
1950년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은 신정상층부와 봉건영주의 압제로부터 농로를 해방한다는 ‘화평해방’과 중국의 분열을 획책하는 제국주의 세력을 추방한다는 미명으로 티베트에 진입하였다.<ref>김재기, 「티베트의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의 기원과 전개」, 『대한정치학회보』 13집 3호, 2006년 : 27-53, p39 인용</ref> 그리고 중국 정부와 티베트 간의 ‘17개조 합의’라 불리는 '''‘서장의 평화적 해방 방법에 관한 협의’'''를 체결하게 된다. 이는 중국의 티베트 정책에 관한 최초의 문건으로 주된 의도는 티베트의 자치보장과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등의 통치지위를 승인하는 것을 조건으로 중국군의 티베트 주둔과 귀속을 확보하려는 것이다.<ref>김재기, 「티베트의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의 기원과 전개」, 『대한정치학회보』 13집 3호, 2006년 : 27-53,, p41 인용</ref> 하지만 당시 조약은 불평등한 관계에서 맺어진 조약이었고, 이후 중국 정부와 티베트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중국정부에 티베트 진입에 대한 티베트 주민들의 저항은 거셌고, 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무력충돌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무력충돌 속에 1959년 3월 10일 라사주둔 인민해방군 사령관이 달라이 라마를 가무단 공연에 초대가 그를 납치하려는 것으로 의심하고 티베트인들이 노블링카 궁전을 에워싸고 달라이 라마를 보호했으며, 포탈라궁에서는 민중회의를 소집하여 티베트 독립을 선언했다. <ref>김재기, 「티베트의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의 기원과 전개」, 『대한정치학회보』 13집 3호, 2006년 : 27-53, p43 인용</ref> 결국 티베트의 중심지인 라사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고, 중국은 무력으로 1963년까지 진압작전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달라이 라마와 자치정부 관리 및 일부 추종자들은 인도로 넘어가 망명정부를 세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티베트의 기존의 전통과 사회질서는 완전히 뒤바뀌는데, 중국 중앙정부는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티베트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수많은 농민들을 해방시켰다는 것을 강조하여 1959년 라사사건을 {{색|red|‘민주개혁’|배경=white}}이라고 불렀다. <ref>이민자, 「티벳독립운동의 경제적 배경」, 『東亞 硏究』Vol.36 No.- [1998], 1998년, p217 참고</ref> 1959년 이전의 티베트는 정치와 종교가 합쳐진 ‘제정일치’ 사회였다. 게다가 승려와 사원들은 막대한 토지와 수많은 농노들을 소유하고 있어서 경제적인 힘까지 가지고 있었다. 즉, 티베트의 정치, 종교, 문화, 사회, 경제 등 모든 부문을 일부 승려와 사원들이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중국 정부의 {{색|red|‘민주개혁’|배경=white}}의 의해 무너지게 되고, 티베트는 사회주의의 체제 속에 종속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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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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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4월에 티벳의 수도 라싸에서 중국이 중국에 대항해서 일어난 티벳독립운동을 진압하고 티벳을 중국에 편입시킨 사건이다. 중국 측에서는, 티벳 영주들에 의해 착취당하던 티벳 일반인들을 해방시키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민주개혁'이라고 명명했다. 이 사건으로 티벳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정치적 망명을 떠났고 약 3천여명의 티벳인들이 같이 떠났으며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티벳의 봉건제도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사회주의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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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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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개혁이 있기 전의 티벳은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봉건제 사회였다. 티벳의 고위층들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독점하는 사회였다. 재산 분배를 살펴보면 경작지의 경우 95%정도를 3대 영주가 독점하고 있었다. 3대 영주는 관가, 귀족, 불교사원을 지칭한다. 그 중에서도 불교사원에서 큰 권력을 가진 상층승려는 경작지의 37%를 소유하고 있었다. 티벳 정부가 거둬드린 세금 등의 수입은 50%가 티벳승들의 종교 활동에 사용되었다. 재산 점유율로 볼 때 종교적 고위층들이 경제적으로 독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농노들이 나머지 5%정도의 경작지만을 소유했다. 거기다가 농노들은 영주들로부터 경제적이 착취를 당했다. 농노들은 영주들에게 내차와 외차라고 불리는 토지임대료를 냈다. 내차는 영주의 자경지에서 대가없이 일하는 것이고 외차는 관청에 노동력을 지불하고 실물과 화폐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내는 토지임대료는 농노들의 전체 수입의 73%정도에 다다랐다. 3대 영주들은 고리대금업 사업의 일환으로 농노들에게 고리대를 놓았다. 그 정도는 사원 영주가 가장 심했다. 또한 농노들에게 강매를 강요했다. 이것은 대부분 하급관리들이 인도와 라싸 지역에서 싼 값에 산 물건들을 자신의 관할에 있는 농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 살 것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은 티벳의 봉건적인 사회구조와 고위층들의 착취로 인해 고통받는 농노들을 해방하기 위해 민주개혁을 시행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민주개혁이 일어나게 된 공식적인 원인이다.
  
==문화대혁명 시기 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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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과정===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나면서 티베트는 완전히 중국정부의 지배아래 놓이게 된다. 이제 그들이 없는 티베트는 상층부와 협의할 필요 없이 사회주의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계급의식과 투쟁을 선동하여 과거 지방정부의 관료, 귀족, 사원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노와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농민조직을 통해 집단 농장화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대약진 운동[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title=%EB%8C%80%EC%95%BD%EC%A7%84%EC%9A%B4%EB%8F%99&action=edit&redlink=1]의 실패와 기근으로 중국인들이 티베트를 더욱 착취하게 만들어 티베트 주민들의 많은 불만을 낳게 한다. <ref>김재기, 「티베트의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의 기원과 전개」, 『대한정치학회보』 13집 3호, 2006년 : 27-53, p44 인용</ref> 1966년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중국 정부의 티베트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티베트 인민들의 종교활동은 엄격히 제한 되었고, 많은 라마들이 환속을 강요받았다. 사원 역시 많이 철거되었는데 문혁 이전 3천 7백여 채의 사원이 있었으나 문혁이우 남은 사원은 10여 채 뿐이었다. 이처럼 강압적인 통치 아래 티베트 분리독립 운동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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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4월에 중국 정부는 티벳의 독립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고 본격적으로 티벳을 중국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중국정부는 티벳의 지방정부인 ‘달라이라마 행정지구’를 폐지했고 ‘티벳 자치구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티벳 정부의 활동을 대신 수행했다. ‘티벳 자치구 준비위원회’는 티벳을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사회로 만들기 위한 활동에 착수했다. 이 기관에서는 1961년 4월에 기본적인 개혁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1959년 9월에는 회의에서 ‘봉건농노주의 봉건소유제를 폐지하고, 농민의 토지소유제를 실시하는 결의에 관하여’을 발표했다.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봉건농노소유제를 폐지했고 농민과 목축민의 개체소유제를 실시할 것을 알렸다. 1961년 8월에는 티벳 자치구에서 제 1회 인민대표대회를 개최했다. 1961년 9월 1일에는 티벳 자치구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민주개혁 이후에도 중앙 정부에서는 사회주의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정책의 변화에 따라 티벳은 경제, 정치, 문화적 환경에 큰 변화를 겪었다.
  
==개혁개방 시기 티베트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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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마오의 시대가 끝나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 정부는 티베트에 대한 자유화 조치를 시행한다. 생산책임제 등의 자유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외국기업의 투자를 확대했으며 티베트 인민들의 종교활동을 보장하고, 종교 문물의 보수 및 보호작업을 전개했다. 또 서장에 머무르고 있더 많은 한족간부들을 내륙으로 불러들였으며, 달라이 마를 귀환시키기 위한 조치도 취하였다. <ref>김재기, 「티베트의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의 기원과 전개」, 『대한정치학회보』 13집 3호, 2006년 : 27-53, p45 참고</ref>
 
  
하지만 이러한 자유화 조치는 오히려 중국 정부와 티베트 간의 갈등을 재점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 인민들은 이전보다 자유롭게 자신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표출시켰고, 사원의 부활은 이들의 단결력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1985년 이후로는 티베트와 중국정부 간의 대화가 단절되었고, 1987년 9월 21일에 달라이 라마가 미국 의회에서 ‘평화 5조안’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티베트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 당시 정부와 티베트 인민들의 무력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수 천명의 시위자가 검거되었다. 이밖에 1988년 3월 조캉 사원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티베트 곳곳에서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소규모 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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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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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경제적 변화는 1959년 이전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원의 재산이 중국에 몰수당한 것이다. 티벳의 사원은 경제력의 부재로 권력을 잃었고 승려와 사원의 수가 대폭 감소했다. 사원에 있던 토지들은 대부분 몰수당했다. 민주개혁 이전에 한 사원이 2000묘를 소유했던 반면 1986년에는 쓰촨성 1개의 현이 가지고 있는 토지가 152묘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이 티벳에 대해 시행했던 정책 중 ‘삼반삼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삼반삼수는 반란, 봉건적인 특권, 착취, 정치적 박해, 계급억압을 반대하는 개혁이다. 사원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농도들이 착취에서 벗어나게 했다. 토지개혁 이후에는 ‘농민개체소유제’를 실시해서 농노들이 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농업, 상업 분야에서는 ‘계획적 배급제도’를 실시했다. 식량과 식용유는 일괄구매를 하게하고 정량공급제가 도입됐고, 소 혹은 양모, 양고기는 할당구매를 하게 되었으며, 민간용 차, 옷감은 배급표에 의해 공급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을 통해 티벳 사회는 사회주의 경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1989년 1월 27일 판첸 라마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대규모 무력시위가 일어난다. 라사 봉기 30주년에 맞춰 일어난 이 시위는 1959년 이래 최대규모의 봉기로 수많은 티베트의 인민들이 중국 정부에 저항하였고, 잠시나마 승리하는 양상을 띠기도 했다. 결국 중국 정부는 같은 해 3월 8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특수부대를 투입시켜 강력진압을 하였다. 잠시 수그러든 시위의 열기는 같은 해 10월 달라이라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거세졌고, 또 한번 중국의 무력진압이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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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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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정치적 변화는 사원의 권력이 민주개혁 이후로 몰락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쓰촨성의 2개의 현의 사원수와 승려 수의 통계를 들 수 있다. 민주개혁 이전에 쓰촨성의 2개의 현의 사원수는 모두 76개였다. 승려의 수는 현 인구의 57%정도를 차지했다. 그러나 민주개혁 이후 사원수는 6개로 대폭 감소했다. 승려들도 소수만 남았다. 그 원인을 보면 민주개혁 이후에 승려들의 절반 이상이 환속을 했다. 1959년 라싸사건에 시위에 참여한 승려들은 감옥에 들어가고 10%정도는 도주했다. 게다가 호조조에서는 환속하는 승려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승려의 수는 감소했고 사원의 힘은 더 약해졌다. 이것은 사원 중심의 정치 구조가 무너지고 평등 정치의 원리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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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90년대 들어서도 티베트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고, 잦은 소규모 항쟁과 몇 번의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다. 1991년과 1992년에 승려들 중심으로 소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1993년 5월에는 89년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중국 정부와 티베트의 갈등양상은 2000년대 들어 달라지는데, 2002년에 정부와 티베트 간의 대화가 재개되어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2004년 달라이라마는 미국 시사주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티베트의 문화와 환경을 보존한다면 중국 내 자치구로 남는 것이 이익일 수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ref>김재기, 「티베트의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의 기원과 전개」, 『대한정치학회보』 13집 3호, 2006년 : 27-53, p49 참고</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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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개혁은 티벳 사회를 정교분리를 하도록 했고 사회주의적인 경제체제를 수립했다. 중국의 주장은 민주개혁을 하고 나서 95%넘는 티벳인들이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획득했다고 주장한다. 티벳 지역에는 학교가 생겼고 농노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주장과는 달리 소수 티벳인들은 중국에 대한 불만이 계속 제기하고 있다. 1987년에 발생한 대규모 독립운동부터 [[3.14사건]]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불만은 여러 방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순수하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 민주개혁 이전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승려계층들의 권력 회복의지, 민주개혁 이후 사회주의 경제체제 발전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것에 대한 불만 등이 있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티베트의 라싸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중국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10명이 중상을 입었다.(중국정부 발표 기준) 반면 티베트 정부는 사건 당시 사망자가 99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이 사건은 국제사회의 많은 관심을 받았고, 중국 정부는 무력진압에 대한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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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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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民子, 1997, 티벳독립운동의 경제적 배경
==티베트 독립운동의 결과==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어진 중국정부와 티베트 간의 갈등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티베트 세력이 반 중국 세력과 인권단체, 국제 NGO 등의 지지를 받으면서 한족과 티베트 족 간의 갈등으로 시작된 싸움은 어느덧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티베트와 완전한 독립을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시간은 중국 정부의 편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고, 장기적으로 티베트인들이 중국 체제에 동화되어 갈 가능성이 높고,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도 중국 측에 분리 독립이 아닌 ‘고도의 자치’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 입장에선 이마저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정부와 티베트 간의 긴장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2016년 6월 27일 (월) 16:50 기준 최신판

민주개혁

개요

1959년 4월에 티벳의 수도 라싸에서 중국이 중국에 대항해서 일어난 티벳독립운동을 진압하고 티벳을 중국에 편입시킨 사건이다. 중국 측에서는, 티벳 영주들에 의해 착취당하던 티벳 일반인들을 해방시키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민주개혁'이라고 명명했다. 이 사건으로 티벳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정치적 망명을 떠났고 약 3천여명의 티벳인들이 같이 떠났으며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티벳의 봉건제도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사회주의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배경

민주개혁이 있기 전의 티벳은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봉건제 사회였다. 티벳의 고위층들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독점하는 사회였다. 재산 분배를 살펴보면 경작지의 경우 95%정도를 3대 영주가 독점하고 있었다. 3대 영주는 관가, 귀족, 불교사원을 지칭한다. 그 중에서도 불교사원에서 큰 권력을 가진 상층승려는 경작지의 37%를 소유하고 있었다. 티벳 정부가 거둬드린 세금 등의 수입은 50%가 티벳승들의 종교 활동에 사용되었다. 재산 점유율로 볼 때 종교적 고위층들이 경제적으로 독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농노들이 나머지 5%정도의 경작지만을 소유했다. 거기다가 농노들은 영주들로부터 경제적이 착취를 당했다. 농노들은 영주들에게 내차와 외차라고 불리는 토지임대료를 냈다. 내차는 영주의 자경지에서 대가없이 일하는 것이고 외차는 관청에 노동력을 지불하고 실물과 화폐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내는 토지임대료는 농노들의 전체 수입의 73%정도에 다다랐다. 3대 영주들은 고리대금업 사업의 일환으로 농노들에게 고리대를 놓았다. 그 정도는 사원 영주가 가장 심했다. 또한 농노들에게 강매를 강요했다. 이것은 대부분 하급관리들이 인도와 라싸 지역에서 싼 값에 산 물건들을 자신의 관할에 있는 농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 살 것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은 티벳의 봉건적인 사회구조와 고위층들의 착취로 인해 고통받는 농노들을 해방하기 위해 민주개혁을 시행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민주개혁이 일어나게 된 공식적인 원인이다.

진행과정

1959년 4월에 중국 정부는 티벳의 독립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고 본격적으로 티벳을 중국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중국정부는 티벳의 지방정부인 ‘달라이라마 행정지구’를 폐지했고 ‘티벳 자치구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티벳 정부의 활동을 대신 수행했다. ‘티벳 자치구 준비위원회’는 티벳을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사회로 만들기 위한 활동에 착수했다. 이 기관에서는 1961년 4월에 기본적인 개혁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1959년 9월에는 회의에서 ‘봉건농노주의 봉건소유제를 폐지하고, 농민의 토지소유제를 실시하는 결의에 관하여’을 발표했다.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봉건농노소유제를 폐지했고 농민과 목축민의 개체소유제를 실시할 것을 알렸다. 1961년 8월에는 티벳 자치구에서 제 1회 인민대표대회를 개최했다. 1961년 9월 1일에는 티벳 자치구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민주개혁 이후에도 중앙 정부에서는 사회주의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정책의 변화에 따라 티벳은 경제, 정치, 문화적 환경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의의

경제적 의의

가장 큰 경제적 변화는 1959년 이전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원의 재산이 중국에 몰수당한 것이다. 티벳의 사원은 경제력의 부재로 권력을 잃었고 승려와 사원의 수가 대폭 감소했다. 사원에 있던 토지들은 대부분 몰수당했다. 민주개혁 이전에 한 사원이 2000묘를 소유했던 반면 1986년에는 쓰촨성 1개의 현이 가지고 있는 토지가 152묘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이 티벳에 대해 시행했던 정책 중 ‘삼반삼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삼반삼수는 반란, 봉건적인 특권, 착취, 정치적 박해, 계급억압을 반대하는 개혁이다. 사원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농도들이 착취에서 벗어나게 했다. 토지개혁 이후에는 ‘농민개체소유제’를 실시해서 농노들이 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농업, 상업 분야에서는 ‘계획적 배급제도’를 실시했다. 식량과 식용유는 일괄구매를 하게하고 정량공급제가 도입됐고, 소 혹은 양모, 양고기는 할당구매를 하게 되었으며, 민간용 차, 옷감은 배급표에 의해 공급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을 통해 티벳 사회는 사회주의 경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정치적 의의

큰 정치적 변화는 사원의 권력이 민주개혁 이후로 몰락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쓰촨성의 2개의 현의 사원수와 승려 수의 통계를 들 수 있다. 민주개혁 이전에 쓰촨성의 2개의 현의 사원수는 모두 76개였다. 승려의 수는 현 인구의 57%정도를 차지했다. 그러나 민주개혁 이후 사원수는 6개로 대폭 감소했다. 승려들도 소수만 남았다. 그 원인을 보면 민주개혁 이후에 승려들의 절반 이상이 환속을 했다. 1959년 라싸사건에 시위에 참여한 승려들은 감옥에 들어가고 10%정도는 도주했다. 게다가 호조조에서는 환속하는 승려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승려의 수는 감소했고 사원의 힘은 더 약해졌다. 이것은 사원 중심의 정치 구조가 무너지고 평등 정치의 원리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결과

민주개혁은 티벳 사회를 정교분리를 하도록 했고 사회주의적인 경제체제를 수립했다. 중국의 주장은 민주개혁을 하고 나서 95%넘는 티벳인들이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획득했다고 주장한다. 티벳 지역에는 학교가 생겼고 농노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주장과는 달리 소수 티벳인들은 중국에 대한 불만이 계속 제기하고 있다. 1987년에 발생한 대규모 독립운동부터 3.14사건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불만은 여러 방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순수하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 민주개혁 이전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승려계층들의 권력 회복의지, 민주개혁 이후 사회주의 경제체제 발전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것에 대한 불만 등이 있다.

참고자료

李民子, 1997, 티벳독립운동의 경제적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