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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백이열전]]을 가장 먼저 수록했다. 물론 시대, 인물 순서대로 책을 편찬했기 때문에 가장 앞선 인물인 [[백이]]를 수록했을 수도 있지만 열전 중 사마천의 논평이 반 이상으로 길다는 점을 통해 볼 때 사마천이 백이 열전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앞에 배치했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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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열전]]은 ‘백이숙제’라는 단어로 익숙한 ‘[[伯夷|백이]]’의 열전이다. 먼 옛날 중국 지역에 고죽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곳의 임금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고 있었다. 당시에는 종법제도에 따라 맏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군주는 총명한 셋째 아들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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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그 군주가 승하하였는데, 숙제는 맏형인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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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째 아들인 백이는 신하들이 왕으로 추대하려고하자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며 고죽국을 떠났고, 셋째 아들인 숙제 또한 형을 따라 떠났다. 그들은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주나라의 서백창([[문왕]])에게 갔으나 이미 주 문왕도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무왕이 즉위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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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 무왕은 그의 아버지의 상이 끝나기도 전에 제후국의 위치에서 천자의 나라인 은나라를 토벌하러 떠나고 있었다. 백이와 숙제는 효(孝)와 인(仁)을 져버리는 일이라며 전쟁을 나서는 주 무왕을 막아섰다. 왕을 막아섰다는 죄로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그들을 알아본 [[강태공|태공망]] 여상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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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숙제는 목숨은 건졌으나 주 무왕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주 무왕은 은나라를 정벌하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어짊을 모르는 주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탄식하며 수양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나라의 곡식을 먹고 살아갈 수 없다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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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어부르는 노래, 즉 채미지가([[采薇之歌]])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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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백이에 대해서 사마천은 열전에서 논평을 아주 길게 서술했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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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오태백]], [[백이]]와 같은 인들은 경서에 자세히 전하면서 [[허유]], [[변수]], [[무광]] 같은 이들은 그 절개와 의리가 본받을만한데 왜 이들의 행적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백이, 숙제는 어진사람이지만 공자의 칭찬으로 더욱 드러났다고 말한다. [[안연]]이 공자의 수많은 수제자 중에서도 공자의 칭찬으로 인해 더욱 진가가 드러나는 것을 예로 들기도 했다. 이러한 사마천의 물음과 답은 민중의 삶을 역사로 남겨 후대에 알리겠다는 열전 편찬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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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공자는 백이숙제는 의를 행하여 죽었기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이에 대해서는 채미지가를 수록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했다고 볼 수 있다. [[采薇之歌|채미지가]]에서 백이숙제는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 구나. 신농, 우 하나라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라고 한다. 백이숙제가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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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 백이와 숙제 그리고 안연 등은 의인이었고 도척은 잔인한 도적인데 왜 의인은 굶어 죽고 악인은 장수하는가? 이것이 하늘의 도리인가? 만약 천도라면 이는 옳은 것인가? 사마천은 천도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고 있고 이에 대한 공자와 가의 의견은 수록했으나 본인의 의견은 제시하지 않고 위와 같은 의문을 남긴 채 열전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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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분류:인물]]

2016년 2월 16일 (화) 00:00 기준 최신판

사마천사기열전에서 백이열전을 가장 먼저 수록했다. 물론 시대, 인물 순서대로 책을 편찬했기 때문에 가장 앞선 인물인 백이를 수록했을 수도 있지만 열전 중 사마천의 논평이 반 이상으로 길다는 점을 통해 볼 때 사마천이 백이 열전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앞에 배치했다고 느껴진다.

백이열전은 ‘백이숙제’라는 단어로 익숙한 ‘백이’의 열전이다. 먼 옛날 중국 지역에 고죽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곳의 임금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고 있었다. 당시에는 종법제도에 따라 맏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군주는 총명한 셋째 아들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했다.

그러던 중 그 군주가 승하하였는데, 숙제는 맏형인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첫째 아들인 백이는 신하들이 왕으로 추대하려고하자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며 고죽국을 떠났고, 셋째 아들인 숙제 또한 형을 따라 떠났다. 그들은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주나라의 서백창(문왕)에게 갔으나 이미 주 문왕도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무왕이 즉위해있었다.

그런데 주 무왕은 그의 아버지의 상이 끝나기도 전에 제후국의 위치에서 천자의 나라인 은나라를 토벌하러 떠나고 있었다. 백이와 숙제는 효(孝)와 인(仁)을 져버리는 일이라며 전쟁을 나서는 주 무왕을 막아섰다. 왕을 막아섰다는 죄로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그들을 알아본 태공망 여상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백이와 숙제는 목숨은 건졌으나 주 무왕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주 무왕은 은나라를 정벌하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어짊을 모르는 주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탄식하며 수양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나라의 곡식을 먹고 살아갈 수 없다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고 말았다.

여기서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어부르는 노래, 즉 채미지가(采薇之歌)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이런 백이에 대해서 사마천은 열전에서 논평을 아주 길게 서술했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오태백, 백이와 같은 인들은 경서에 자세히 전하면서 허유, 변수, 무광 같은 이들은 그 절개와 의리가 본받을만한데 왜 이들의 행적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백이, 숙제는 어진사람이지만 공자의 칭찬으로 더욱 드러났다고 말한다. 안연이 공자의 수많은 수제자 중에서도 공자의 칭찬으로 인해 더욱 진가가 드러나는 것을 예로 들기도 했다. 이러한 사마천의 물음과 답은 민중의 삶을 역사로 남겨 후대에 알리겠다는 열전 편찬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공자는 백이숙제는 의를 행하여 죽었기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이에 대해서는 채미지가를 수록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채미지가에서 백이숙제는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 구나. 신농, 우 하나라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라고 한다. 백이숙제가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세째, 백이와 숙제 그리고 안연 등은 의인이었고 도척은 잔인한 도적인데 왜 의인은 굶어 죽고 악인은 장수하는가? 이것이 하늘의 도리인가? 만약 천도라면 이는 옳은 것인가? 사마천은 천도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고 있고 이에 대한 공자와 가의 의견은 수록했으나 본인의 의견은 제시하지 않고 위와 같은 의문을 남긴 채 열전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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