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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청사와 신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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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9일 (목) 20:25 판

개요

신청사(新淸史)란, 1990년대 말, 미국 학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청대사 연구 경향이다.
신청사의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이블린 러스키(Evelyn S. Rawski), 파멜라 크로슬리(Pamel K. Crossley), 마크 엘리엇(Mark C. Elliott), 조안나 웨일리-코헨(Joanna Waley-Cohen)등이 있다.
'신청사'라는 용어가 어떠한 학자에 의해 정의된 적은 없었지만, 2004년 미국에서 발표된 청대사 관련 논문집이 '신청사'라는 이름으로 출판 되었던 것과 청대사의 연구경향을 논의하는 비평 논문 등에서 '신청사(The New Qing History)' 라는 용어가 적극적으로 사용 되었던 것이 '신청사'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기존의 청사와 신청사

기존의 청사 신청사
'청'의 존속 기간
1644년 ~ 1911년

1644년 : 명의 멸망

1911년 : 청의 멸망 & 중화민국 수립
1626년 ~ 1912년

1626년 : 금의 ‘대청’ 제국선포 (홍타이지)

1912년 : 청의 푸이 퇴위
청조에 대한 시각
청조는 중국 왕조 역사의 한 부분
청조가 단순한 중국 왕조의 일부분은 아님
만주족을 보는 시각
청조의 만주족들은 모두 한화(漢化)되었음
청조의 역사 속에서 충분히 만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찾아 볼 수 있음

기존의 청사는 청의 존속기간을 1644년부터 1911년까지로 보고 있다.
이 기간에서 1644년은 명의 멸망시기를 의미하고, 1911년은 청조의 멸망과 중화민국 정부의 수립 시기를 의미한다.
기존의 청사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청의 존속기간을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청을 단순히 명의 다음에 위치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전에 위치한 중국 제국의 역사중의 한 부분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존 청사연구의 주체는 존.K.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1907.5.24 ~ 1991.9.14))와 중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이다.
위와 같은 학자들에게 어째서 청을 만주족이 정복한 정복왕조가 아닌 중국왕조의 역사 중 하나로 보냐고 묻는다면 이들은 청 제국이 설립된 이후의 만주족들이 모두 한족에게 동화, 즉 한화(漢化)되어 만주족의 독자적인 문화나 정체성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만주족의 제국이었던 청조에서, 만주족들이 한족과 완전히 동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한족이 세운 중화민국이 청의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청사 학파의 학자들은 기존 청사를 연구하던 학자들의 시각을 다소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적인 경향을 보인다며 비판하고 새로운 의견을 밝혔다.

신청사 학자들은 청조를 만주족의 정체성을 뚜렷이 띈 국가로써 보는 입장에서, 청조의 존속년도를 1636년부터 1912년까지로 설정하고 있다.
1636년은 후금의 태종이었던 홍타이지가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꾼 년도이며, 1912년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가 퇴위한 년도이다.
사실 신청사는 아직까지도 활발히 연구중인 학문으로써 학자들마다 청조가 시작되는 시기에 대한 논의(청조의 팔기가 만들어지게 된 1601년, 청의 전신인 후금이 설립되었던 1616년 등)가 있지만,
어느 시기가 되었던 간에 신청사 학자들은 청의 시작을 청제국 자체의 역사를 중점으로 둔다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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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사(新淸史)
14년도 7월 가욕관에서
기본 정보
성명 박현기 (웅경)
출생년도 1993.08.20
출생지 전라남도 광양, 순천, 광주
취미와 특기 농구, 사진
교내외 활동

1. 2012년도 1학기-2013년도 1학기 : 과내 밴드 소모임 유클락 활동(드럼)

2. 2013년도 2학기-2014년도 1학기 : 중국 상해 교환학생 1년 화동사범대학교
특이사항 사진을 매우 좋아해서 과행사를 전담하고 있다.
관심있는 중국분야 중국 여행, 문화, 음식, 사랑

내용과 특징

신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특징을 보자면

  • 만주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심을 가짐
기존의 청사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만주족과 중화제국, 중국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비한족 집단과의 관계에 주목해서 중국인과 중국 문화가 균질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한다.
  • 한족 중심적인 민족주의 입장에서 ‘청사’를 파악하는 것을 지양
이것은 청조를 단순히 중국사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려는 시각을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청조를 많은 동이(東夷)들의 제국, 내륙아시아의 제국이라고 주장한다.
  • 청조가 기존의 중화제국들이 시행하던 정책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책들을 사용한 것에 주목
대표적으로 청조의 팔기제도가 만주족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제도라고 주장하며 타 왕조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독자적인 정책들(다중 수도제, 변발, 만주어 사용 등)을 사용한 것은 전통적으로 중화제국 역사상에 내려져 오던 조공 제도나 중화중심론과 같은 사상과는 무관했다고 주장한다.
  • 만문자료를 새로운 자료로써 채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
과거 기존의 청사 연구 학자들은 만주어로 쓰여진 만문자료를 단순히 한문자료의 번역본 정도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져 만문자료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지만, 신청사 학자들은 이와같은 태도를 비판하며, 만문자료를 연구하는 것이 청 제국의 역사 혹은 중국사 전반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신청사 분기

마크 C.엘리엇과 파멜라 크로슬리

신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러 사회적, 문화적 분야에서 존재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두 학자를 뽑자면 마크 엘리엇(Mark C. Elliot)과 파멜라 크로슬리(Pamel K.Crossley)를 들 수 있다.
이 두 명의 학자는 다른 신청사 학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이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청조를 세우고 한족을 지배할 때 만주족들의 생활방식이나 의식체계가 한화(漢和)되어 민족적 정체성이 상실 된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이들은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이 어떤 체계나 방식으로써 존재했고 유지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방식의 차이에서 이 두 학자의 의견이 대립된다.
청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서 중점인 '만주족의 정체성'에 관하여 마크 엘리엇은 만주족이 청조라는 국가를 세우고, 그들만의 제도인 팔기제도를 확립함과 함께 만주족의 정체성이 생겨나 그 정체성이 존속되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멜라 크로슬리는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팔기제도의 형식과 위상이 시기에 따라 변함과 함께 변화해 온 것이라는 주장을 피력한다.

팔기제도(八旗)

팔기(八旗)제란, 청조를 지배한 만주족만의 특수한 군사·행정 조직이다.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할 당시 함께 만든 제도로써, 장정 300명을 1니루로 묶고, 5니루를 1자란으로 묶고, 다시 5자란을 1쿠사 혹은 1기(旗)로써 묶는 형식이다. 7,500여명의 장정이 속한 1개의 기가 8개가 모여서 하나의 팔기를 형성하는데, 후금 시기부터 시작하여 시기가 지남에 따라 팔기의 규모와 형태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후에 본래 하나의 팔기에서 만주족과 한인, 몽고인을 구분해내기 위해 한군팔기(漢軍八旗)와 몽고팔기(蒙古八旗)를 나누고, 만주팔기(満州八旗)를 따로 구별하여 호칭을 주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변방을 맡아 관리했던 주방팔기(駐防八旗)나 북경의 경비를 담당했던 북경팔기(北京八旗)도 존재했다.
팔기군에 속한 집단 엘리트층을 기인(旗人)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토지지급이나 관직세습과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생활을 했으며 실제로도 일반 백성들과 분리되어 생활했다고 알려진다.

마크 C.엘리엇의 주장

팔기제의 제도적 의미

엘리엇은 만주족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은 청조의 팔기제도로써 대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팔기제도는 기존의 중국 왕조의 주류를 이루던 한족과는 다른 만주족만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뚜렷한 지표이며, 제도라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이기 때문에 이 팔기제가 폐지되는 순간까지, 즉 청조가 패망하게 되는 순간까지 청 제국의 성격과 만주족의 정체성은 상실되지 않고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엘리엇은 만주족이 팔기에 주류로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만주족과 기인을 동일한 개념으로써 설명하고, '기인'이라는 용어가 팔기 안에 속한 단순한 법적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적 특성과 범주처럼 사용되었고, 민족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로 인식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엇은 팔기에 의해 기인이라는 집단이 성립되었을때 부터 이미 만주족의민족적 정체성이 생성되었고, 팔기가 유지됨에 의해 정체성 또한 변함없이 유지되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주의 법도

청의 제 6대 황제였던 건륭제(乾隆帝)는 자신의 통치기간에 '만주의 법도'를 중요시했다.
이는 과거 12세기 여진족이 중국 대륙을 정복했지만 결국 완전한 지배를 성공하지 못하고 패망하는 역사를 본 건륭제가 여진족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중요시 되었다.
결국 건륭제는 만주의 법도를 지키고 실천함으로써 팔기제의 기인들로 하여금 강건함과 활력을 가지게 함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과의 집단적인 차별성을 가지게 하려 했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청 후기의 만주족 기인들은 만주의 법도를 실천하는데에 게을리 했고, 이는 천천히 만주족을 파멸로 이끌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청의 패망시기까지 권력을 잃지는 않았으며, 19세기에도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기인이라는 집단의 지위를 지켜냈다.
엘리엇은 결국 이러한 상황에도 만주족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수호하여 청에서의 만주족의 지위를 지켜낸것이 바로 팔기제라는 실체적인 제도로써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한군팔기

<blackquote>"나는 더이상 너희 한인들을 믿지 않는다" -1622년, 누르하치(天命帝)</blackquote> 엘리엇은 위와 같은 누르하치의 발언에 주목했다. 이러한 발언은 당시에 '한인'이라는 개념이 이미 단순히 정치적 범주가 아닌 민족적인 개념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와 당시의 사람들은 이에 기반한 민족적 차별의식(한인과 만주족을 구별하는)이 내면에 깔려있었고, 이는 17세기 초반 이미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덧붙여, 이러한 민족적 차별의식은 한인들에게도 민족적 정체성을 구축할수 있게끔 했다.

결국 엘리엇은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팔기제와 함께 구축되었고, 이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상태로써 팔기제와 함께 청조가 패망할때까지 존속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엇의 주장에 따르면 청 제국의 행정과 군사제도가 팔기제를 중심축으로 하여 수핻되고 유지되었기 때문에 청 제국은 어디까지나 만주족의 국가였으며, 한족의 문화와 생활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파멜라 크로슬리의 주장

변화해온 만주족의 정체성

크로슬리와 엘리엇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만주족의 정체성의 변화의 유무라고 할 수있다. 크로슬리 역시 만주족의 정체성은 존재했지만, 청조의 국가적 발전과정에 따라 그리고 제도적 변화에 따라 만주족의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존속했다는 것이다.
특히나 크로슬리는 만주족의 '민족성'개념을 청조의 황실 문화의 맥락과 함께 생각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의 만주족은 민족이라기 보다는 부족에 가까웠는데, 청조의 황실 이데올로기는 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족의 성격과 특징 등 정체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들을 민족성으로 재구성 하는 것이 자신들이 국가를 통치하는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고, 유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크로슬리는 만주족의 정체성이란 본래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또다시 여러가지 필요에 의해 변화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니칸과 한군팔기

크로슬리 또한 만주족의 정체성을 대변하는데 있어서 팔기제도와 이에 따른 엘리트 집단인 기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크로슬리는 만주족의 정체성이 변화함을 주장하기 위해 이를 이용하는데, 만주족의 정체성이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을 팔기제도와 기인의 지위가 변화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크로슬리는 팔기제도와 기인의 지위가 변화한 것을 4가지의 시기로 구분한다.

  1. 1582년 ~ 1626년
    • 누르하치 시기에 통치 집단이 형성된 시기
  2. 1627년 ~ 1643년
    • 홍타이지(숭덕제,崇德帝)가 후금 제국을 수립하고 기인이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편입된 시기
  3. 17세기 후반
    • 청조가 중국과 동몽골을 정복한 시기
  4. 18세기 후반
    • 청조를 서부와 남동부로 확장 시킨 시기

크로슬리는 청조의 엘리트 집단이었던 기인이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고 변화해 온 것은 '전통적인' 만주족 정체성 혹은 문화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만주족의 문화와 정체성이 고정되어 온 것이 아닌, 변화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팔기제와 기인의 지위가 변화한것은 니칸(漢人)과 한인팔기에 대한 청 황실의 정의가 끊임없이 변화했다는 것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니칸이란, 요동 지역에 살던 한인들을 만주어로써 일컫는 말이다.청의 초기 국가 성립 과정에서 니칸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그러나 17세기 말 삼번의 난 진압 후에는 만주족 황실에서는 한군팔기를 "한인"으로 계보화 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한군팔기의 정치적 위상을 인위적으로 격하시켰다.
이때에도 이 한군팔기와 만주팔기를 구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만주족의 후예이냐 아니면 한군팔기에 속한 기인의 후예이냐를 입증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중반에는 건륭제가 "한군팔기는 원래 모두 한인"이라고 선포하며, 한군팔기를 만주족과 확실히 구분하여 정복층,엘리트 층에서 배제시켰다.
청 제국은 요동의 오랜 니칸 가문의 후손들 중에 한군 팔기에 남아 있던 자들은 만주팔기로 이적시켜 주었으며, 위와 같은 건륭제의 선포 이전과 이후에 편입된 한군은 구별되어 후에 들어온 한군은 두 마음을 품은 신하라는 의미의 이신(貳臣)이라는 호칭으로 격하 되었다.
이처럼 니칸과 한군팔기의 위상이 변화하는 것을 보며 크로슬리는 역시나 만주족의 문화적 정체성은 변화하며 존속했다고 주장한다.

민족성과 정체성의 차이

크로슬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민족성'이라는 용어의 사용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 몇가지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크로슬리는 민족성이라는 것은 특정집단을 비정상적, 주변적, 이질적인 소수자로 만들때 사용되는 용어인데, 만주족은 실제로 국가와 권력에 의해 우월하고, 중심적, 정통적인 집단으로써, 즉 민족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배경과 반대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 만주족이기 때문에 애초에 민족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필자가 생각하기에는 크로슬리는 민족성이라는 용어보다도 정체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엘리엇이 생각할 때 청조 정체성을 대표하는 팔기와 엘리트 집단인 기인이 하나의 민족집단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반청 혁명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근대적인 현상이며, 태평군이 과거에 중국을 유린한 이민족이자 당시 시기에는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던 무능한 청조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꺼낸 용어가 바로 만주족, 몽골족과 같은 종족적, 민족적 용어였다.
크로슬리는 단순한 '만주족' 그 자체나 '한인'과 같은 일원적이고 단선적인 개념으로는 청의 제국질서와 만주족의 정체성을 일률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또한 몽골족이나 만주족과 같은 종족적인 용어의 개념으로써도 19세기 이전의 만주족의 정체성을 설명하기에 전혀 타당하지 않게 되는 것임을 주장했다.
결국 크로슬리는 민족성이란 단순히 청조의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을 마무리했다.

기타

황싱타오(黃興濤)

<청대만인 중국정체성(清代满人的"中国认同")>

중국의 역사학자인 황싱타오는 미국의 신청사 학파의 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의 논문인 清代满人的 "中国认同"을 발표했다.
위 논문은, 신청사 학자들은 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가 아닌 유목민의 역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약; 미국에서 일어난 신청사 중국의 역사보다 유목민의 역사로보는게 맞다 중국은 반박; 여러민족이 혼합된 상태에서 중국은 언제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한족의 문화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문제다.

민족국가(민족자결주의)자체가 근대적 개념 그래서 이걸로 과거읮ㄷᆞ중국을 이해하는ㅈ것 오류 과거중국은 여러민족 혼합

참고자료

  • <신청사의 등장과 분기>, 김선민 저
  • <만주족의 청제국>,이훈 김선민 역, 마크.C.엘리엇 저
  • <신 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