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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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ccable13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일 (목) 16: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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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란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의 총칭이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는 '비단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 한(前漢 : 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오손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장건을 중앙 아시아로 파견했다.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당시 서역이라고 칭해지던 중앙 아시아 및 서방 각지와 사절을 교환하게 되었고, 여러 문물이 왕래하게 되었다.

당시에 실크로드는 남·북 양 도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의 서쪽 관문이었던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는 로프노르 호 남안의 미란으로부터 쿤룬 산맥의 북쪽을 지나 야르칸드에 이른 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나가는 남로(南路)였고, 또 하나는 투루판[吐魯蕃]에서 톈산 산맥 남쪽을 지나 카슈가르에서 파미르를 넘어 페르가나로 가는 북로(北路)였다. 남로에는 다시 야르칸드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 북쪽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전한 때에는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出使)하여 전한말 이래 중단되었던 서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고, 나아가 AD 97년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 로마)으로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와 시리아 및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옴으로써 실크로드의 서쪽 끝을 연장시키고 중국인들의 서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당대(唐代 : 618~907)였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돌궐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마침 돌궐이 동·서 양국으로 분열되고 서돌궐에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하여 서돌궐을 제압했다. 이무렵 로프노르 호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어 남도의 이용도가 낮아졌고, 북도는 둔황에서 북상하여 하미[哈密]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톈산 남로)과 톈산 산맥 북쪽을 지나는 길(톈산 북로)이 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구자(龜玆 : 한대의 서역국가)와 북정(北庭 : 짐사)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하게 했다. 이후로는 비단 무역을 비롯한 동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를 본거지로 하는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했다. 9세기 무렵에는 당의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족과 서쪽에서 진출해온 이슬람 상인이 그들을 대신했다. 송대 이후로는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파르티아·홍해를 지나 카이로에 도달한 후 다시 이곳을 거쳐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했다. 이와 함께 육로는 점차 쇠퇴해갔다.


(기존자료-정리필요) 무제는 월지국이 흉노에게 패했다는 정보를 얻게 되자, 그들과 연합하여 흉노를 칠 계획으로 낭관인 장건을 사자로 월지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월지에 파견된 장건과 그의 일행은 즉각 흉노에게 잡혀 10여 년간 억류되었다. 이 동안에 그는 흉노 여성을 아내로 맞아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탈출하여 수십 일만에 대월지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하를 속국으로 삼아 번영한 이 나라는 흉노와 싸울 의지가 없었으므로 장건은 1년 남짓한 체류 후에 타림 분지의 남쪽을 거쳐 귀로에 올랐다. 거기서 그는 다시 한번 흉노에게 붙잡혀 1년간 억류되었지만 내분을 이용하여 126년에야 가까스로 창안에 돌아왔다. 장건의 목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로 인해 서역의 사정이 중국에 알려졌다. 서역에는 36국이 있었는데 이들 국가들이 연결되는 길을 통하여 중국과 서역의 문물이 교류되었다. 중국의 비단이 서쪽으로 운반되었고, 서역의 특산인 포도와 석류 등은 물론 인도의 불교도 이 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전해 왔다. 바로 이 길은 비단길, 또는 실크로드라 부른다.

의의

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앙 아시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끊임없이 사절을 교환했고, 민간인들의 왕래도 빈번하게 되었다. 또한 사신과 민간인의 잦은 왕래는 문물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는 많은 구법승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각국에서 불교를 지원하는 풍조에 힘입어 많은 인도 승려들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당대에는 불교가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현장(玄奘)의 역경사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중국 고유의 유교·도교와 함께 당대의 3대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불교 이외에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로마에서 이단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景敎), 이슬람교 등도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전해졌다. 또한 당대의 장안에는 페르시아인을 비롯해 적지 않은 수의 서역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호복(胡服)·호모(胡帽)·호악(胡樂)·호무(胡舞)·호병(胡餠) 등 각종 호풍(胡風)을 유행시켰다. 서역의 문물이 중국 사회에 전파되는 한편, 중국의 주철(鑄鐵) 기술, 양잠, 제지법 등이 서방으로 전달되었다.

실크로드는 이같이 상업면에서뿐만 아니라 동서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실크로드는 현재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吳爾自治區]를 잇는 포장도로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지리적 구분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이것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敦煌]까지 이르는 구간, 역대에 장안(長安 : 지금의 시안[西安] 또는 뤄양[洛陽])을 기점으로 했고,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이었다.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이며,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쿤룬 산맥[崑崙山脈] 북쪽)과 사막 북쪽(톈산 산맥[天山山脈]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갈래가 있어서 남로는 파미르 고원의 쿠시쿠르간에서 서쪽으로 쿠샨 왕국에 이르고,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천축(天竺 : 인도의 옛 이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른다. 북로는 강거(康居 : 漢魏시대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스 평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투르크계 유목민족국가)에서 서쪽으로 이란을 지나 곧장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거의 수천 리로 이어져 지금의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여 개 국가를 거쳐간다. 이 세 부분 가운데 동쪽 부분은 역사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중앙과 서쪽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3대 간선

〔〔초원로〕〕〔〔오아시스로〕〕 〔〔해로〕〕

5대 지선

마역로

라마로

불타로

호박로

메소포타미아로

교류

상업

문학

종교

신실크로드

참고자료

- <<실크로드학>>, 정수일, 창작과 비평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