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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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만두2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6월 25일 (일) 15: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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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악비(岳飛)는 1103년, 하남성 상주(지금의 하남성 탕음현)에서 가난한 농민 악화(岳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기운을 가졌으며, 30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송나라의 빼놓을 수 없는 장군이 되었다. 유광서(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등과 함께 남송의 대군벌을 이루었다. 39세의 나이에 재상 진회(秦檜)의 참소로 목숨을 잃기까지 오로지 '중원 복귀, 송조 부흥'이라는 목표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악비(岳飛)의 생애

백조 한 마리가 울며 날아가다

악비가 태어난 하남성은 흔히 중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4천여 년간의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누적된 지역이다. 그동안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패권을 다투었으며, 20여 개의 왕조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하남성 상주(탕음현)은 가뭄과 홍수에 자주 시달렸는데, 이렇듯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악비(岳飛)가 높은 기개와 기상을 갖춘 무인으로 자라난 것은 우연히 아닐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 요씨(姚氏)가 악비를 잉태하여 분만하려 했을 때 그의 집 지붕 위로 큰 백조 한마리가 울며 날아갔다고 한다. 이를 보고 아들이 장래에 높고 멀리 날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飛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그래서 그의 자도 飛와 비슷한 뜻인 붕거(鵬擧)이다.

악비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매우 셌으며, 용맹하여 11세에 무술스승 진광(陳廣)으로부터 창술과 검술을 배우고 주동(周同)이라는 활의 명수로부터 궁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양손모두로 활을 쏴 백발백중을 맞추는 명궁수가 되었다. 그가 다른 무인들보다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무용이 특출났을 뿐 아니라 학문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 또한 좋아하여 <손자>, <오자>등의 병법을 두루 섭렵했으며, 말이 적고 침착한 성격을 지녔다고 알려져있다. 이외에도 역사를 공부하여 역대 와조의 흥망성쇠를 탐구했고, 망해가는 조국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0세의 나이에 절도사에 임명되다

악비는 북송이 멸망할 무렵인 1122년, 19세에 의용군에 지원하여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127년에 동경유수 종택(宗澤)이 휘하에 있던 악비의 자질과 역량을 키워주고자 악비를 불러 그에게 "재능과 용맹은 천하에 다시 없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야전을 할 때에 있어 전략 전술을 배워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악비는 "정세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략 전술의 운용은 정세에 맞추어서 하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악비는 이미 비범한 전략가로서의 면모도 갖추도 있었던 것이다.

후에 같은 해 북송이 멸망하자 악비는 상주에 있던 강왕에게 찾아가 충성을 맹세했는데, 강왕은 비범한 악비의 풍모에 그를 받아들였다. 후에 악비는 그의 밑에서 승신랑(承信郞)을 거쳐 병의랑(秉義郞)으로 승진했다.

1130년, 27세 때에는 상주와 진강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건강(建康)지역을 수복했다.

1134년에는 금나라 위제의 군대를 격파하고 양양 등 여섯 고을을 탈환하여 청원군절도사(淸遠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1137년에는 선무사(宣撫使)에 임명되어 양자강과 회화 남부 사이의 중원 지역을 일부 수복했다.

정충보국(精忠報國)을 등에 새기다

정충보국을 등에 새기는 악비

악비는 일평생 우국충절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한번에 악비가 전장으로 떠나기전 그의 어머니 요씨(姚氏)가 그를 불러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지켜 불의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며 아들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글자를 새겨주었다. 이후 악비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침은 물론이며, 항상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남송 고종이 악비에게 '정충악비(精忠岳飛)'라고 친필로 쓴 붉은 깃발을 하사 할때 나눈대화가 전해져온다. 고종은 악비에게 '장군의 집이 초라하다 하니 향주에 새로 집을 지어줄까하는데 생각이 어떠한가?"라고 물었지만, 악비는 "북쪽 오랑캐가 멸망하지 않았는데 어찌 집을 새로이 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에서 악비는 개인의 풍족을 사사로이 원하지 않았고, 청렴결백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악비는 벼슬아치들이 청렴결백하고 오로지 백성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펴야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황제에게 간언을 하며 옳고 그름을 논하기도 했던 문무를 겸비한 신하였던 것이다.

악비가 한창 금나라 군대를 격파할 당시에 악비군은 송나라 백성들에게 희망 그 자체였다. 사실 당시 전쟁 중에는 금나라 군대 뿐만 아니라 송나라 군대 조차 백성들을 약탈하는 광경이 비일비재했는데, 악비군은 전혀 달랐다. 악비군은 당시 송나라 군대에서도 유명할만큼 군기가 강했었고, 악비의 통솔에 따라 '추호도, 범죄도 없는 군대'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의 기대와 지지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막수유죄(莫須有罪)로 사약을 받다

연전연승을 이어가던 악비는 황하 유역에서 두 차례에 걸쳐 금나라 군대에 크게 이겼다. 심지어 금나라 군대 내에서도 악비와 내통하기까지 해 항복하려는 의사를 보인 금나라 장군도 더러 있었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악비는 조정에 총공격 명령을 내려달라는 상주문을 올리고 당시 금나라 도읍의 요충지였던 황룡부 공격을 준비하는 등 금나라 군대 격파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당시 송나라 조정의 간신이었던 진회(秦檜)는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주화파로서 금나라에 맞서는 악비를 비롯한 장군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해왔다. 이에 따라 진회(秦檜)는 전선의 장군들에게 회군 명령을 내렸다. 악비는 이처럼 좋은 기회는 없다며 회군을 거절했지만, 하루 12회나 오는 회군 명령에 조정의 뜻을 간파하며 하늘에 대고 이렇게 통곡했다고 한다.

십년 쌓은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여러 군을 얻었으나 하루아침에 없어지네/ 국가를 중흥하기 어렵고/ 천하가 다시 찾을 길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