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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활약한 연(燕)나라의 무장. 조·초·한·위·연의 군사를 이끌고 당시 강대국이던 제를 토벌했다. 연나라 소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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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中 악의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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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춘추전국시대, 이채윤 지음
 
*인물로 읽는 춘추전국시대, 이채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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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2017년 6월 22일 (목) 20:53 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활약한 연(燕)나라의 무장. 조·초·한·위·연의 군사를 이끌고 당시 강대국이던 제를 토벌했다. 연나라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제나라 전단(田單)의 이간책으로 사죄(死罪)를 덮어쓰게 되어 조나라로 달아나 관진(觀津)에 봉해졌다. 그러나 혜왕이 그를 잃은 것을 후회하여 사죄해 왔기 때문에 연·조 두 나라의 객경(客卿)이 되었다.

악의(樂毅)의 생애

연(燕)의 ‘아경’으로 임명받다

연나라 연소왕(燕昭王)은 옛날 선왕 때 자지(子之)의 난을 기화로 제나라가 쳐들어와 연나라 군사를 크게 패주시킨 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연나라는 소국이며 중원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제나라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 때, 악의는 위소왕(魏昭王)에 의해 사자의 임무를 띠고 연나라로 가게 되었다. 연왕은 악의를 손님의 예로써 대했지만 악의는 이를 사양하고 연나라의 신하가 되려고 하였다. 연왕은 악의를 '아경(亞卿)'으로 임명했다.

연합군을 형성하고, 제나라를 공격하다

당시 천하의 정세는 제민왕(齊湣王)이 다스리던 제나라가 강대하여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군사를 중구(重丘)에서 격파했고, 서쪽으로는 삼진(三晋)의 군사를 관진(觀津)에서 물리쳤으며, 이어서 삼진과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 민왕은 제호를 버리고 왕호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자기가 불세출의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며 자존망대하자 백성들은 그의 정치를 견뎌낼 수 없었다. 이에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연소왕이 악의에게 제나라를 정벌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악의가 대답했다.

「제나라는 옛날부터 패업을 이루어 무시하지 못할 여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땅은 넓고 백성들은 많아 연나라 혼자서 공격해서는 쉽게 이길 수 없는 나라입니다. 대왕께서 만일 제나라를
기필코 정벌하려고 하신다면 조(趙), 초(楚), 위(魏) 삼국과 연합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연왕은 악의를 사자로 삼아 조혜문왕에게 보내고, 초와 위 두 나라에는 별도의 사자를 보냈다. 악의는 조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공격하여 생기는 이익을 들어 진나라를 설복하게 했다. 제후들은 제민왕의 교만하고 포악한 행동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다투어 연나라와 합종하여 제나라에 대한 정벌전에 참여하려고 했다. 연소왕은 조나라에서 돌아와 복명한 악의를 상장군에게 임명하고 연나라의 군사들을 모두 일으켰다. 악의는 조(趙), 초(楚), 한(韓), 위(魏), 연(燕) 오국의 병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나라 군사들을 제서(濟西)에서 대파했다.

제나라의 모함으로 조나라에 투항하다

악의가 5년 동안 제나라 땅을 순행하면서 70여 개 성을 점령하고 군현(郡縣)으로 만들어 연나라에 복속시켰으나 오직 거성(莒城)과 즉묵(卽墨)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때 연나라 본국에서는 소왕이 죽고 그 아들 혜왕이 새로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 혜왕은 태자 시절부터 악의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어서 연나라에 태자가 왕위에 새로 섰다는 소식을 들은 제나라의 장수 전단(田單)이 반간계를 쓰기 위해 첩자를 연나라로 보내며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연나라 장수 악의가 제나라의 모든 성을 점령했으면서도 유독 거성과 즉묵 두 곳만을 그대로 두고 있는 이유는 악의가 연나라의 새로운 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군사를 계속 거느린 채 제나라
에 계속 머물면서 남면하여 제나라 왕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제나라의 걱정은 악의를 대신해서 다른 장수가 오는 경우이다.」

그 소문을 전해 듣고 악의를 의심하게 된 연혜왕은 기겁(騎劫)을 보내 대장의 직을 대신하게 하고 악의는 연나라 본국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악의는 연왕이 자기를 대장의 직에서 물러나게 한 일은 안 좋은 감정으로 행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의는 결국 조나라에 투항했다. 조나라는 악의를 관진(關津)에 봉하고 망제군(望諸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기타

유적

당시 조나라 수도였던 허베이성 한단(邯鄲)시에 약 100제곱미터의 땅에 높이 약 3미터의 원형 봉분이 있으며, 최근에 비석이 세워졌다. 이전의 비석은 모택동이 주도한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매년 인근 마을의 악씨 후손들이 무덤을 참배하러 온다. 또한 산둥성 쥐현의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악의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고사성어

  • 화우지계(火牛之計)
“남을 희생물로 삼아 자기의 이익을 챙긴다”는 의미의 고사성어.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제(齊)나라 전단(田單)이 쓴 전법(戰法)의 하나이다. 악의가 해임되고 기겁(騎劫)이라는 장수가 총대장으로 임명된 뒤, 전단은 다시 간첩 공작으로 헛소문을 퍼트리며 기겁의 군대를 방심하게 만든다. 전단은 성 밑을 파서 지하도를 만든 후에 천여 마리의 소를 붉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 거기에 오색(五色)으로 용의 그림을 그린 다음, 양쪽 뿔에 칼을 붙들어 매고 꼬리에는 기름이 묻은 갈대를 매달았다. 적을 다 취하게 만든 후에 신장(神將)처럼 꾸민 장사 오천 명이 칼을 들고 뒤따르며 쇠꼬리에 불을 붙여 소가 날뛰도록 하여 연나라는 대패하고 기겁은 죽었으며 전단은 칠십여 성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 사기열전 中 악의열전
  • 인물로 읽는 춘추전국시대, 이채윤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