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후 변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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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가 위 텍스트의 논리에 주된 논리가 되는 이유는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무제)라는 나라의 이데올로기가 남성 위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한나라(비록 시기는 다르지만)의 학자 반고와 여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존재하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사마천이 여후를 긍정하는 모습도 보인다.<br>  
 
사마천의 『사기』가 위 텍스트의 논리에 주된 논리가 되는 이유는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무제)라는 나라의 이데올로기가 남성 위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한나라(비록 시기는 다르지만)의 학자 반고와 여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존재하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사마천이 여후를 긍정하는 모습도 보인다.<br>  
우선, 사마천의 대표적인『사기』와 [[반고]]의『[[한서]]』의 저술 순서에서 사마천이 반고에 비해 여후를 긍정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사마천의『사기』의 저술 순서가 유방- 여후 - 혜제 순인 반면, 반고의 『한서』의 저술 순서가 유방 - 혜제 - 여후라는 점을 고려해 보자. 이는 사마천이 생각하는 여후가 반고가 바라보는 여후보다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이 여태후라는 명칭을 여후에게 부여한 반면 반고는 그녀를 <고후>라는 명칭을 부여한 점을 보자. 이는 사마천이 여후의 지위를 태후까지 격상시켰지만, 반고는 그저 여후에게 <고조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함으로써 그녀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췄다. 반고의 『한서』가 『사기』보다 후대에 쓰였다는 점과 반고의『한서』저술 방식이 사마천의 『사기』저술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보면, 반고는 사마천의 사기를 어느 정도 참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반고에 비해 사마천은 여후를 긍정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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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사마천의 대표적인『사기』와 [[반고]]의『[[한서]]』의 저술 순서에서 사마천이 반고에 비해 여후를 긍정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사마천의『사기』의 저술 순서가 유방- 여후 - 혜제 순인 반면, 반고의 『한서』의 저술 순서가 유방 - 혜제 - 여후라는 점을 고려해 보자. 이는 사마천이 생각하는 여후가 반고가 바라보는 여후보다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이 여태후라는 명칭을 여후에게 부여한 반면 반고는 그녀를 <고후>라는 명칭을 부여한 점을 보자. 이는 사마천이 여후의 지위를 태후까지 격상시켰지만, 반고는 그저 여후에게 <고조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함으로써 그녀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췄다. 반고의 『한서』가 『사기』보다 후대에 쓰였다는 점과 반고의『한서』저술 방식이 사마천의 『사기』저술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보면, 반고는 사마천의 사기를 어느 정도 참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반고에 비해 사마천은 여후를 긍정한 것이다.<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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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앞서 제시했듯이 사마천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태후 본기』는 “여태후는 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취한 아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미천한’이라는 용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유방]]은 진(秦)의 사수(泗水) 정장(亭長)이라는 신분이었다. 여기서 정장이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며, 이는 여후의 아버지인 [[여공]]이 유명한 관상가이고 부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애초부터 엄청난 계층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유방이 귀한 관상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그에게 최선을 다해 내조한다. 우선 그가 패 지역에서 반진 대열에 합류하기 전 그녀는 2명의 자식이 있는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방이 반진 대열에 합류하자, 그녀는 집 안의 여성이 아닌 집 ‘밖’의 여성이 되었다. 유방이 패(沛)지역,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지역에서 자신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유방을 찾아가 보필하였고, 『史記』卷8,「高祖本紀」) 유방(劉邦)이 수배자였던 시절에는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史記』卷96,「張丞相列傳」) 초한(楚漢)전쟁 중에는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 군대에게 대패하였을 때 그녀는 초(楚)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그 후 초한(楚漢)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2년 5개월 동안 초(楚)의 포로생활을 하다 석방되기도 하였다.(『史記』 卷8,「高祖本{紀」) 이렇게 유방을 집 밖에서 내조한 것은 당대 여성들처럼 집안일만 하는 것과는 다른, 당대의 신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조는 유방이 한을 건국할 때 그 역할이 더 커진다. (여후의 큰오빠 주여후는 한 건국을 위해 장렬히 전사했다.)한(漢) 제국이 건립되어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면서 그녀는 황후가 되었는데, 한나라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 제왕(齊王) 한신(韓信)과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주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 예이다. (『史記』卷92 ,「淮陰侯列傳」, 『史記』卷90,「魏豹彭越列傳」)<br><br>
 
그리고 앞서 제시했듯이 사마천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태후 본기』는 “여태후는 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취한 아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미천한’이라는 용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유방]]은 진(秦)의 사수(泗水) 정장(亭長)이라는 신분이었다. 여기서 정장이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며, 이는 여후의 아버지인 [[여공]]이 유명한 관상가이고 부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애초부터 엄청난 계층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유방이 귀한 관상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그에게 최선을 다해 내조한다. 우선 그가 패 지역에서 반진 대열에 합류하기 전 그녀는 2명의 자식이 있는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방이 반진 대열에 합류하자, 그녀는 집 안의 여성이 아닌 집 ‘밖’의 여성이 되었다. 유방이 패(沛)지역,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지역에서 자신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유방을 찾아가 보필하였고, 『史記』卷8,「高祖本紀」) 유방(劉邦)이 수배자였던 시절에는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史記』卷96,「張丞相列傳」) 초한(楚漢)전쟁 중에는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 군대에게 대패하였을 때 그녀는 초(楚)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그 후 초한(楚漢)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2년 5개월 동안 초(楚)의 포로생활을 하다 석방되기도 하였다.(『史記』 卷8,「高祖本{紀」) 이렇게 유방을 집 밖에서 내조한 것은 당대 여성들처럼 집안일만 하는 것과는 다른, 당대의 신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조는 유방이 한을 건국할 때 그 역할이 더 커진다. (여후의 큰오빠 주여후는 한 건국을 위해 장렬히 전사했다.)한(漢) 제국이 건립되어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면서 그녀는 황후가 되었는데, 한나라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 제왕(齊王) 한신(韓信)과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주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 예이다. (『史記』卷92 ,「淮陰侯列傳」, 『史記』卷90,「魏豹彭越列傳」)<br><br>

2016년 6월 18일 (토) 00:22 판

====여태후 변호(-사마천의 『사기』를 중심으로)====

논의에 앞서, 여태후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앞서 살펴봤듯이 ‘잔인한 악녀’라는 부정적인 관점이 주를 이룬다. 여태후라는 인물이 한 업적이 무시 못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 판단, 그녀에 대한 변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위 항목을 만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여태후를 변호하는 입장이라도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녀의 잔혹한 행동은 인간의 도덕성에 극히 위배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본인이 변호하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를 근거로 하여 그녀가 그런 잔혹한 행동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사마천의 『사기』가 위 텍스트의 논리에 주된 논리가 되는 이유는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무제)라는 나라의 이데올로기가 남성 위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한나라(비록 시기는 다르지만)의 학자 반고와 여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존재하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사마천이 여후를 긍정하는 모습도 보인다.
우선, 사마천의 대표적인『사기』와 반고의『한서』의 저술 순서에서 사마천이 반고에 비해 여후를 긍정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사마천의『사기』의 저술 순서가 유방- 여후 - 혜제 순인 반면, 반고의 『한서』의 저술 순서가 유방 - 혜제 - 여후라는 점을 고려해 보자. 이는 사마천이 생각하는 여후가 반고가 바라보는 여후보다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이 여태후라는 명칭을 여후에게 부여한 반면 반고는 그녀를 <고후>라는 명칭을 부여한 점을 보자. 이는 사마천이 여후의 지위를 태후까지 격상시켰지만, 반고는 그저 여후에게 <고조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함으로써 그녀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췄다. 반고의 『한서』가 『사기』보다 후대에 쓰였다는 점과 반고의『한서』저술 방식이 사마천의 『사기』저술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보면, 반고는 사마천의 사기를 어느 정도 참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반고에 비해 사마천은 여후를 긍정한 것이다.

그리고 앞서 제시했듯이 사마천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태후 본기』는 “여태후는 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취한 아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미천한’이라는 용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유방은 진(秦)의 사수(泗水) 정장(亭長)이라는 신분이었다. 여기서 정장이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며, 이는 여후의 아버지인 여공이 유명한 관상가이고 부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애초부터 엄청난 계층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유방이 귀한 관상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그에게 최선을 다해 내조한다. 우선 그가 패 지역에서 반진 대열에 합류하기 전 그녀는 2명의 자식이 있는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방이 반진 대열에 합류하자, 그녀는 집 안의 여성이 아닌 집 ‘밖’의 여성이 되었다. 유방이 패(沛)지역,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지역에서 자신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유방을 찾아가 보필하였고, 『史記』卷8,「高祖本紀」) 유방(劉邦)이 수배자였던 시절에는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史記』卷96,「張丞相列傳」) 초한(楚漢)전쟁 중에는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 군대에게 대패하였을 때 그녀는 초(楚)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그 후 초한(楚漢)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2년 5개월 동안 초(楚)의 포로생활을 하다 석방되기도 하였다.(『史記』 卷8,「高祖本{紀」) 이렇게 유방을 집 밖에서 내조한 것은 당대 여성들처럼 집안일만 하는 것과는 다른, 당대의 신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조는 유방이 한을 건국할 때 그 역할이 더 커진다. (여후의 큰오빠 주여후는 한 건국을 위해 장렬히 전사했다.)한(漢) 제국이 건립되어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면서 그녀는 황후가 되었는데, 한나라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 제왕(齊王) 한신(韓信)과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주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 예이다. (『史記』卷92 ,「淮陰侯列傳」, 『史記』卷90,「魏豹彭越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