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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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kyeongv v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6월 23일 (금) 14: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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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伍子胥)

출생 ?
사망 기원전 484년

오자서(伍子胥, ? ~ 기원전 484년)는 중국 춘추 시대 오나라의 정치가로, 자서(子胥)는 자이며, 이름은 운(員)이다. 춘추 말기 초(楚)나라 대부 오사(伍奢)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선조는 원래 성이 건(乾)이고 이름이 황(荒)이었는데, 주(周)나라에 공을 세워 오철공(伍哲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오(伍)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본래 초나라 출신이나 아버지와 형이 평왕(平王)의 노여움을 사 처형된 뒤 초나라를 떠났다. 그 뒤 오나라의 약진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점점 오나라 왕 부차(夫差)와 사이가 벌어져 목숨을 잃었다.

오자서의 생애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오자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아버지인 오사(伍奢)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태부(太傅) 지위에 있으며 태자의 스승이었으나, BC 522년 태자 옹립의 내분에 말려들어 장자인 상(尙: 오자서의 형)과 함께 결국 평왕에게 처형당했다. 오자서는 녕(寧: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 일대), 정(鄭: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등의 나라를 거쳐 아슬아슬하게 오(吳: 지금의 강소성 소주)나라로 달아나, 오나라의 힘을 빌어 아버지와 형을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였다.

복수의 화신, 오자서

오자서는 오나라에 도착한 이후 공자광(公子光)을 보좌하였다. 광은 원래 왕이 되었어야 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복 동생 요에게 왕위를 빼앗긴 상태였다. 오자서는 이 사실을 알고 광의 쿠데타에 협력하여 BC 515년 공자광은 오나라의 왕위를 탈취하여 오왕 합려가 되고 오자서를 재상에 임명했다. BC 506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 즉 공자광)는 손무(孫武: ≪손자병법≫의 저자)를 대장, 오자서를 부장으로 삼고 6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와 손무는 군대를 이끌고 회수(淮水) 유역에서 한수(漢水)로 들어가 5전 전승을 거두고 초나라의 수도 영(郢: 지금의 강릉<江陵>)을 함락시켰다. 이때 초나라는 평왕은 이미 죽고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다. 오자서는 직접 초나라 왕실을 점령하여 평왕의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결국 원한을 갚았다. 사기 오자서열전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예전의 친구였던, 신포서(申包胥)가 오자서의 행동을 지적하며, “일찍이 평왕의 신하로서 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천리(天理)에 어긋난 일이 또 있겠는가?” 하며 너무 가혹하다고 비난했지만, 오자서는 “나의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莫途遠,吾故倒行而逆施之。)”고 하였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즉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다'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초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그는 신(申: 지금의 황포강<黃浦江> 하류 일대)에 봉해졌으며, 이로 인해 그를 신서(申胥)라고도 한다.

오자서의 최후

BC 496년 강대해진 오나라는 패권 야욕으로, 월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월왕 구천의 참모 범려와 지혜 대결에서 패하고, 오군은 월나라에 대패하게 된다. 이 때의 상처로 합려는 사망하게 된다. 합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아들 부차(夫差)는 오자서를 상국(相國)에, 대부 백비(伯噽)를 태재(太宰)에 임명하였다. 2년 후 오나라 왕 부차는 절치부심 끝에 월나라 왕 구천을 부초(夫椒)에서 격파하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오자서는 지금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 부차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였으나, 부차는 그의 말을 끝내 듣지 않고 구천을 용서해주었다. 당시 월나라에서는 구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비에게는 많은 뇌물을 써서 부차를 설득토록 하고, 부차에게는 많은 미인들을 바쳐 그의 환심을 사두었었다. 여기에서 바로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자서는 이러한 월나라의 계책을 간파하고 누차 부차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오자서는 부차의 무능으로 오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임을 예감하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두 아들을 제나라의 친척 포목(飽牧)과 유명(維明)의 집에 맡겨두고 왔다. BC 484년 부차는 제후의 패주(覇主)를 차지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는 다시 그것을 반대하고 월나라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경고하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부차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백비 등이 오자서가 제나라와 결탁하였다고 모함하자, 부차는 그들의 참언을 믿고 오자서에게 속루(屬鏤)의 검을 주어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자결하기 전에 비분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부차에게 말하였다. "그 옛날 선왕들께는 대대손손 보좌를 해온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난제에 부닥쳐도 그 득실을 잘 헤아려서 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을 버리고, 우매한 간신배들을 가까이하여 국정을 전횡하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대왕의 뜻에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왕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부하들에게 "내 눈을 도려내어 수도 고소성(姑蘇城: 지금의 강소성 소주) 동문에 걸어두라! 월나라 군대가 입성하는 꼴을 똑똑히 봐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부차는 크게 분노하며 오자서의 시신을 찢어 전당강(錢塘江)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BC 473년 마침내 월나라의 공격에 크게 패한 부차는 자결하면서, "오자서를 만날 낯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오자서의 병서인 ≪오자서(伍子胥)≫ 10편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고 있다. 오자서의 고향 임리현(臨利縣)에는 "오상사(伍相祠)"와 "오자서묘(伍子胥廟)", "오자서수부(伍子胥帥府)" 등의 건물을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참고자료

사마천 - 사기(史記) 66권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