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번째 줄: 2번째 줄:
 
장쩌민
 
장쩌민
 
==개요==
 
==개요==
양저우 출신으로 상하이 자오퉁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기술직을 맡는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쳐 상하이 시장직을 맡은 그는 1989천안문사건 시기에 당 총서기로 발탁된다. 이후 1993년 국가 주석으로 취임했고, 2000년에는 3개대표론을 발표한다. 2002년 후진타오에게 당 총서기직을 물려주었고, 2003년 국가주석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
양저우 출신으로 상하이 자오퉁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기술직을 맡는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쳐 상하이 시장직을 맡은 그는 [[1989천안문사건]] 시기에 당 총서기로 발탁된다. 이후 1993년 국가 주석으로 취임했고, 2000년에는 3개대표론을 발표한다. 2002년 [[후진타오]]에게 당 총서기직을 물려주었고, 2003년 국가주석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생애==
 
==생애==
 
===출생 및 학창 시절===
 
===출생 및 학창 시절===
15번째 줄: 15번째 줄:
 
외교국에서 새 임무를 맡은 그는 루마니아에서 머물면서 외교적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고, 1976년에는 외교국의 국장으로 승진해 중앙정부의 장관급 서열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 시기 중국은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4인방]]의 체포 직후 장쩌민은 중앙 당 서기처의 부름을 받아 '[[중앙위원회]] 상하이 공작조'에 속하게 된다. 이때 그가 맡은 임무는 그간 해온 일 중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는 4인방의 연관 세력을 숙청하고 복권시킬 사람들을 결정하는 일을 맡았다. 상하이 공작조에서의 시간은 1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지만, 이 시기는 그를 기술자로서의 과거를 청산하고 당의 지도자로서 부상하게 한 중요한 시기였다. 1977년 7월 [[덩샤오핑]]이 다시 권력을 잡았을 무렵, 장쩌민은 상하이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내세웠고, 장쩌민은 대외무역과 투자를 다루기 위해 설립된 위원회의 부주임을 맡게된다. 그는 [[경제특구]]에 대한 계획들을 성공시켜야 하는 책임을 갖고 10여 개 국가의 수출단지들을 방문했다. 이 기간동안 각 나라의 자유무역 지대와 산업단지에 감명을 받은 장쩌민은 후에 "국제 경제의 발전상을 직접 본 후, 경제특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한층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와 대표단은 지방정부에 세금 혜택, 토지 임대, 소규모의 외국인 투자까지 결정하는 권한을 주라고 촉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장쩌민은 이제 [[경제특구]]의 창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것이었고, 그가 보여준 탁월한 능력은 곧 당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1982년 대외경제 관계를 다루는 부처들이 통합되면서 그는 전자공업부장(장관급)을 맡는다.
 
외교국에서 새 임무를 맡은 그는 루마니아에서 머물면서 외교적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고, 1976년에는 외교국의 국장으로 승진해 중앙정부의 장관급 서열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 시기 중국은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4인방]]의 체포 직후 장쩌민은 중앙 당 서기처의 부름을 받아 '[[중앙위원회]] 상하이 공작조'에 속하게 된다. 이때 그가 맡은 임무는 그간 해온 일 중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는 4인방의 연관 세력을 숙청하고 복권시킬 사람들을 결정하는 일을 맡았다. 상하이 공작조에서의 시간은 1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지만, 이 시기는 그를 기술자로서의 과거를 청산하고 당의 지도자로서 부상하게 한 중요한 시기였다. 1977년 7월 [[덩샤오핑]]이 다시 권력을 잡았을 무렵, 장쩌민은 상하이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내세웠고, 장쩌민은 대외무역과 투자를 다루기 위해 설립된 위원회의 부주임을 맡게된다. 그는 [[경제특구]]에 대한 계획들을 성공시켜야 하는 책임을 갖고 10여 개 국가의 수출단지들을 방문했다. 이 기간동안 각 나라의 자유무역 지대와 산업단지에 감명을 받은 장쩌민은 후에 "국제 경제의 발전상을 직접 본 후, 경제특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한층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와 대표단은 지방정부에 세금 혜택, 토지 임대, 소규모의 외국인 투자까지 결정하는 권한을 주라고 촉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장쩌민은 이제 [[경제특구]]의 창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것이었고, 그가 보여준 탁월한 능력은 곧 당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1982년 대외경제 관계를 다루는 부처들이 통합되면서 그는 전자공업부장(장관급)을 맡는다.
 
===상하이 시장직을 맡다===
 
===상하이 시장직을 맡다===
1985년 상하이 시장 왕따오한의 임기가 만료되던 당시 장쩌민은 전자공업부 부장으로서 중국을 컴퓨터 시대로 진입시키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왕따오한과 오랜 친분이 있던 장쩌민은 상하이 시장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반겼고, 7월에 시장으로 공식 지명이 된다. 그는 시장으로서 상하이의 낡은 인프라를 재건할 계획을 세워나갔다. 1986년 상하이에서 문화혁명 이후 가장 크고 위험했던 학생 시위가 일어났지만 장쩌민은 큰 불상사 없이 시위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그는 유능한 경제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임기 중 실질적으로 완성된 것은 새 기차 정거장뿐이었고 다른 사업들은 수렁에 빠졌다.
+
1985년 상하이 시장 왕따오한의 임기가 만료되던 당시 장쩌민은 전자공업부 부장으로서 중국을 컴퓨터 시대로 진입시키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왕따오한과 오랜 친분이 있던 장쩌민은 상하이 시장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반겼고, 7월에 시장으로 공식 지명이 된다. 그는 시장으로서 상하이의 낡은 인프라를 재건할 계획을 세워나갔다. 1986년 상하이에서 [[문화대혁명]] 이후 가장 크고 위험했던 학생 시위가 일어났지만 장쩌민은 큰 불상사 없이 시위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그는 유능한 경제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임기 중 실질적으로 완성된 것은 새 기차 정거장뿐이었고 다른 사업들은 수렁에 빠졌다.
 
===국가 주석이 되다===
 
===국가 주석이 되다===
 
[[1989천안문사건]]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의 실각 후 그의 후계자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신임 총서기가 중앙의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시위의 강경 진압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사람이길 원했다. 진압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는 국내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지속할 사람을 원했다. 결국 덩샤오핑은 중국의 차기 당 총서기로 장쩌민을 낙점했다. 장쩌민은 그간 여러 분야를 옮겨다니느라 중앙의 파벌에 속할 틈이 없었고, 상하이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을 차분하게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특히 장쩌민은 개혁개방정책을 적극 추진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성을 띠어 천안문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에 동조하던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주동자들을 처형하는 등 신속한 대처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덩샤오핑이 반대파를 다룰 때 바라는 정치적 수완과 들어맞았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의 당내 입지 강화를 위해 힘썼고, 장쩌민 스스로도 자신의 지지기반을 마련해갔다. 장쩌민은 1989년 11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데 이어, 1993년 국가 주석으로 취임한다.
 
[[1989천안문사건]]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의 실각 후 그의 후계자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신임 총서기가 중앙의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시위의 강경 진압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사람이길 원했다. 진압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는 국내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지속할 사람을 원했다. 결국 덩샤오핑은 중국의 차기 당 총서기로 장쩌민을 낙점했다. 장쩌민은 그간 여러 분야를 옮겨다니느라 중앙의 파벌에 속할 틈이 없었고, 상하이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을 차분하게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특히 장쩌민은 개혁개방정책을 적극 추진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성을 띠어 천안문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에 동조하던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주동자들을 처형하는 등 신속한 대처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덩샤오핑이 반대파를 다룰 때 바라는 정치적 수완과 들어맞았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의 당내 입지 강화를 위해 힘썼고, 장쩌민 스스로도 자신의 지지기반을 마련해갔다. 장쩌민은 1989년 11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데 이어, 1993년 국가 주석으로 취임한다.
24번째 줄: 24번째 줄:
 
  "새 시대의 중국 공산당은 선진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하고 선진 문화발전 방향을 대표하며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
 
  "새 시대의 중국 공산당은 선진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하고 선진 문화발전 방향을 대표하며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전 인민의 정당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중국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기업가 등 새로운 사회계층에도 당을 개방해야 한다는 획기적인 발언이었다. 그리고 3개 대표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성질을 가지는 동시에 경제발전과 사회진보의 실제에 근거하여 당의 계급적 기초를 증강하고 당의 대중적 기초를 확대해 사회적 영향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말했다. 장쩌민은 사영기업주, 자유기업인 등이 속한 계층의 공산당 가입이 계속 금지된다면 당은 국가를 이끌어간다고 자처할 수 없으므로, 중국이 앞으로 글로벌 지식경제 체제를 이끌려면 당이 이념을 현대화해야 하며 3개 대표론은 그 실천 메커니즘이 될 것으로 여겼다. 중국공산당은 2001년 8월 열린 중앙공작회의에서 3개 대표론은 덩샤오핑이 내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 이론을 혁신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헌법에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3개 대표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그리고 덩샤오핑 이론과 더불어 당의 중요한 지도사상으로 당 규약에 반영했고, 마침내 2004년 수정헌법에도 반영했다.
+
이는 중국 공산당이 전 인민의 정당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중국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기업가 등 새로운 사회계층에도 당을 개방해야 한다는 획기적인 발언이었다. 그리고 3개 대표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성질을 가지는 동시에 경제발전과 사회진보의 실제에 근거하여 당의 계급적 기초를 증강하고 당의 대중적 기초를 확대해 사회적 영향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말했다. 장쩌민은 사영기업주, 자유기업인 등이 속한 계층의 공산당 가입이 계속 금지된다면 당은 국가를 이끌어간다고 자처할 수 없으므로, 중국이 앞으로 글로벌 지식경제 체제를 이끌려면 당이 이념을 현대화해야 하며 3개 대표론은 그 실천 메커니즘이 될 것으로 여겼다. [[중국공산당]]은 2001년 8월 열린 중앙공작회의에서 3개 대표론은 덩샤오핑이 내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 이론을 혁신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헌법에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3개 대표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그리고 [[덩샤오핑]] 이론과 더불어 당의 중요한 지도사상으로 당 규약에 반영했고, 마침내 2004년 수정헌법에도 반영했다.
 
===경제건설 가속화===
 
===경제건설 가속화===
 
장쩌민은 [[덩샤오핑]] 노선을 계승했고, 근본적으로 [[개혁개방]]을 가속화해 경제건설을 이끌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유지했다. 그는 덩샤오핑 이론의 위대한 가치를 들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사업을 적극 전개해 21세기를 향해 전진하자고 역설했다.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이론을 배경으로 국유기업 개혁과 기업제도 현대화, 그리고 계획경제 요소 완화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모순이 등장하면 과감히 바로잡는 후속조치들을 내놓았다.
 
장쩌민은 [[덩샤오핑]] 노선을 계승했고, 근본적으로 [[개혁개방]]을 가속화해 경제건설을 이끌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유지했다. 그는 덩샤오핑 이론의 위대한 가치를 들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사업을 적극 전개해 21세기를 향해 전진하자고 역설했다.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이론을 배경으로 국유기업 개혁과 기업제도 현대화, 그리고 계획경제 요소 완화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모순이 등장하면 과감히 바로잡는 후속조치들을 내놓았다.

2019년 6월 13일 (목) 00:58 기준 최신판

출생 1926.08.17

장쩌민

개요

양저우 출신으로 상하이 자오퉁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기술직을 맡는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쳐 상하이 시장직을 맡은 그는 1989천안문사건 시기에 당 총서기로 발탁된다. 이후 1993년 국가 주석으로 취임했고, 2000년에는 3개대표론을 발표한다. 2002년 후진타오에게 당 총서기직을 물려주었고, 2003년 국가주석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생애

출생 및 학창 시절

1926년 8월 17일 양저우에서 장스쥔과 우웨칭이라는 이름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쩌민'이라는 이름은 공자의 저술에서 따온 것으로 '인민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장쩌민은 어린 시절부터 악기를 능숙하게 다뤘고 중국과 러시아,서양의 문학을 두루 즐겼다. 특히 애국심이 담긴 시를 좋아했는데 이는 어린 시절 일본의 조국 침략을 지켜본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 공산당 당원이었던 숙부 장상칭이 항일전쟁 중 사망하자 장쩌민의 부모는 그를 홀로 남은 숙모에게 입양 보낸다. 후일 이는 장쩌민에게‘혁명가 가문이라는 배경을' 만들어줌으로써 당으로부터 한층 더 두터운 신임을 받고, 정치적 이력에도 활력을 띠게 해주는 배경이 된다. 장쩌민은 양저우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난징중앙대학교의 산업기술 및 전기기계 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국민당 교육부가 난징중앙대학교 폐쇄를 명령하면서 상하이 자오퉁대학교에 다니게 된다. 1946년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봉했으며 과학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서구의 부르주아적 인식을 받아들였다. 그가 볼 때 공산주의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혁명적 방법이었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해 엔진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시기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그는 위민공장의 공장 당 지부장 자리를 맡게 되었고 이것이 그가 중국공산당에서 맡은 최초의 지도자 자리였다. 새로운 사회주의 방식의 모범인 당의 젊은 간부들은 결혼을 일찍 해야만 했기에 그는 1949년 고교 동창 왕예핑과 결혼했다. 1952년 공산당이 소비에트 방식의 5개년 계획을 입안하면서 기술력을 갖춘 당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장쩌민은 1954년 초에 베이징에 가 '제1기계제작부'의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했다. 그는 곧 다른 직책도 맡았는데 그 중 하나가 창춘에 있는 '제1 자동자공장'에 배정된 것이었다. 1956년 이른바 우파 숙청이 시작되었고 장쩌민은 공장의 당 책임자로서 직원들 중 일정한 수의 우익을 솎아내야만 했다. 그는 이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살기 위해 숙청에 동참했고, '마오의 중국'에서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대약진 시기

1958년 마오쩌둥은 경제발전의 대약진을 촉구했다. 마오의 대약진운동은 장쩌민이 있던 창춘의 자동차공장에도 시행됐고 공장 관리자들은 급하게 야심찬 생산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잘못된 산업 정책에 의한 경제적 재앙이 전국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피폐한 농촌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창춘 자동차의 근로자들은 농촌 지원에 파견되었고 1961년이 되자 창춘 자동차는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생산량을 부풀린 국영기업의 관리자들은 쫓겨나거나 좌천되기 시작했고 1962년 초 장쩌민은 창춘 공장에서 다시 상하이의 연구소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것은 승진이었으며 좌천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문화대혁명 시기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1966년 5월, 장쩌민은 '제1기계제작부'가 새로 만든 '열발전 기계 연구소'로 이직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돌풍이 몰아치면서 '제1기계제작부'의 관리들이 모두 숙청되기 시작했고 곧 장쩌민 역시 위기에 처하게 됐다. 홍위병들은 장쩌민을 공격할 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지식인이라는 배경에,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며, 소련에서 기술을 배워왔다는 등등이 모두 죄목이 되었다. 그들은 또한 그가 '부르주아적 생활방식'으로 살아왔다는 점도 고발 내용에 포함시켰다. 사실 장쩌민에게는 그러한 죄목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두 개의 강점이 있었는데 혁명 순교자의 아들이라는 점과 그의 전문 분야가 과학기술 연구였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탄핵을 받아 연구소장직에서 쫓겨났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노동 및 사상개조의 이름으로 '57 간부학교'에서의 힘겨운 나날을 보낸 후 1970년에 외교국에서 새 자리를 얻는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줄곧 공장과 연구소에서 일했을 뿐, 관직을 맡지는 못했었기 때문에 그의 외교국 즉, 베이징 입성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중앙에 다가서다

외교국에서 새 임무를 맡은 그는 루마니아에서 머물면서 외교적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고, 1976년에는 외교국의 국장으로 승진해 중앙정부의 장관급 서열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 시기 중국은 저우언라이마오쩌둥의 사망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4인방의 체포 직후 장쩌민은 중앙 당 서기처의 부름을 받아 '중앙위원회 상하이 공작조'에 속하게 된다. 이때 그가 맡은 임무는 그간 해온 일 중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는 4인방의 연관 세력을 숙청하고 복권시킬 사람들을 결정하는 일을 맡았다. 상하이 공작조에서의 시간은 1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지만, 이 시기는 그를 기술자로서의 과거를 청산하고 당의 지도자로서 부상하게 한 중요한 시기였다. 1977년 7월 덩샤오핑이 다시 권력을 잡았을 무렵, 장쩌민은 상하이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덩샤오핑개혁개방 정책을 내세웠고, 장쩌민은 대외무역과 투자를 다루기 위해 설립된 위원회의 부주임을 맡게된다. 그는 경제특구에 대한 계획들을 성공시켜야 하는 책임을 갖고 10여 개 국가의 수출단지들을 방문했다. 이 기간동안 각 나라의 자유무역 지대와 산업단지에 감명을 받은 장쩌민은 후에 "국제 경제의 발전상을 직접 본 후, 경제특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한층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와 대표단은 지방정부에 세금 혜택, 토지 임대, 소규모의 외국인 투자까지 결정하는 권한을 주라고 촉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장쩌민은 이제 경제특구의 창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것이었고, 그가 보여준 탁월한 능력은 곧 당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1982년 대외경제 관계를 다루는 부처들이 통합되면서 그는 전자공업부장(장관급)을 맡는다.

상하이 시장직을 맡다

1985년 상하이 시장 왕따오한의 임기가 만료되던 당시 장쩌민은 전자공업부 부장으로서 중국을 컴퓨터 시대로 진입시키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왕따오한과 오랜 친분이 있던 장쩌민은 상하이 시장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반겼고, 7월에 시장으로 공식 지명이 된다. 그는 시장으로서 상하이의 낡은 인프라를 재건할 계획을 세워나갔다. 1986년 상하이에서 문화대혁명 이후 가장 크고 위험했던 학생 시위가 일어났지만 장쩌민은 큰 불상사 없이 시위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그는 유능한 경제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임기 중 실질적으로 완성된 것은 새 기차 정거장뿐이었고 다른 사업들은 수렁에 빠졌다.

국가 주석이 되다

1989천안문사건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덩샤오핑자오쯔양의 실각 후 그의 후계자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신임 총서기가 중앙의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시위의 강경 진압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사람이길 원했다. 진압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는 국내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지속할 사람을 원했다. 결국 덩샤오핑은 중국의 차기 당 총서기로 장쩌민을 낙점했다. 장쩌민은 그간 여러 분야를 옮겨다니느라 중앙의 파벌에 속할 틈이 없었고, 상하이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을 차분하게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특히 장쩌민은 개혁개방정책을 적극 추진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성을 띠어 천안문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에 동조하던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주동자들을 처형하는 등 신속한 대처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덩샤오핑이 반대파를 다룰 때 바라는 정치적 수완과 들어맞았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의 당내 입지 강화를 위해 힘썼고, 장쩌민 스스로도 자신의 지지기반을 마련해갔다. 장쩌민은 1989년 11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데 이어, 1993년 국가 주석으로 취임한다.

정책 및 업적

3개 대표론

장쩌민은 2000년 2월 광둥 지방 당정간부회의에서 이른바 '3개 대표론'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 시대의 중국 공산당은 선진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하고 선진 문화발전 방향을 대표하며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전 인민의 정당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중국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기업가 등 새로운 사회계층에도 당을 개방해야 한다는 획기적인 발언이었다. 그리고 3개 대표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성질을 가지는 동시에 경제발전과 사회진보의 실제에 근거하여 당의 계급적 기초를 증강하고 당의 대중적 기초를 확대해 사회적 영향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말했다. 장쩌민은 사영기업주, 자유기업인 등이 속한 계층의 공산당 가입이 계속 금지된다면 당은 국가를 이끌어간다고 자처할 수 없으므로, 중국이 앞으로 글로벌 지식경제 체제를 이끌려면 당이 이념을 현대화해야 하며 3개 대표론은 그 실천 메커니즘이 될 것으로 여겼다. 중국공산당은 2001년 8월 열린 중앙공작회의에서 3개 대표론은 덩샤오핑이 내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 이론을 혁신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헌법에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3개 대표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그리고 덩샤오핑 이론과 더불어 당의 중요한 지도사상으로 당 규약에 반영했고, 마침내 2004년 수정헌법에도 반영했다.

경제건설 가속화

장쩌민은 덩샤오핑 노선을 계승했고, 근본적으로 개혁개방을 가속화해 경제건설을 이끌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유지했다. 그는 덩샤오핑 이론의 위대한 가치를 들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사업을 적극 전개해 21세기를 향해 전진하자고 역설했다.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이론을 배경으로 국유기업 개혁과 기업제도 현대화, 그리고 계획경제 요소 완화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모순이 등장하면 과감히 바로잡는 후속조치들을 내놓았다.

참고자료

『장쩌민』,브루스 질리, 2002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장쩌민』,로버트 로렌스 쿤, 2005

『중국 최고 정치지도자들의 리더십』,이승익,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