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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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姜齊)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제(田齊)의 시대로 제후의 성씨가 바뀌는 얘기 -강태공의 제나라가 전태공의 제나라가 되다.

춘추 시대 초기에 진(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 군주 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당시에는 전(田)과 진(陳)의 발음이 같았다고 한다.

 전씨와 제나라 공실의 유대는 점차 돈독해졌고 환공의 총애를 얻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춘추 시대 말기에 이르자 전씨 가문은 점차 제나라의 신흥 세력으로 떠올랐다. 반면 제나라 공실은 귀족들간의 알력으로 쇠퇴하여 갔다.

제나라 경공(景公: 재위 기원전 547년~490년) 때 전씨는 대부로 이미 상당한 역량을 갖춘 터였다. 신흥 세력의 대표인 전환자(田桓子)는 공실에 맞설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나라 공실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여 점차 민심을 잃었다.

 전환자는 공실에서 떠난 민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머리를 썼다. 그 방법은 백성들에게 춘궁기에 대두(大斗)로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소두(小斗)로 거두어 들인 것이다. 같은 한 말(斗)이지만 대두와 소두는 양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전환자의 민심 회유 방법은 실효를 거두었다. 많은 백성들이 공실의 착취를 기피하여 점차 전씨 가문에서 양곡을 빌렸다. 백성들의 전환자에 대한 신망은 점차 높아갔다. 상대적으로 공실의 신망은 허물어져 갔으며, 많은 백성이 공실을 버리고 전씨 가문에 귀의하였다. 제나라 공실의 백성들은 전씨의 은민(隱民)으로 변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공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레서 제나라 공실의 구귀족들과 전씨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쟁투가 발생하였다. 첫번째 쟁투는 기원전 532년에 발생했는데 전환자는 도음 주위에 사는 백성인 국인(國人)들을 동원하여 집정 귀족의 우두머리인 란(欒)씨와 고(高)씨를 압도하였고 이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두번째 쟁투는 기원전 489년에 발생하였다. 이때는 전환자의 아들인 전걸(田乞)이 주축이 되어 대부들을 규합하여 공실을 압박하였다. 공실의 잔류 귀족들은 또다시 패배하여 쫓겨나게 되었고 전걸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치, 군사 대권을 장악하였다.
 세번째 쟁투는 기원전 481년에 발생하였다. 이번은 전걸(田乞)의 아들인 전상(田常)이 중심이 되어 제나라 간공(簡公)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과 벌인 싸움이었다. 전상은 전씨 종친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대결하였다. 결국 간공은투쟁에서 패해 공실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며 전상이 보낸 군대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전상은 간공의 동생을 군주에 앉혔는데 그가 평공(平公)이었다. 전상은 재상을 맡아 국정을 주물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그는 또 자신의 사유 토지를 크게 늘려갔다. 이리하여 개인의 봉읍 면적이 공실 소유의 토지보다 많아졌으며, 계속하여 대두로 양식을 빌려 주고 소두로 거둬 들이는 방법으로 민심을 더욱더 얻어나갔다.
 전상은 이제 제후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이미 삼가분진(三家分晉)으로 독립하여 신흥 세력이 된 한(韓), 조(趙), 위(魏)의 대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제후들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일찍이 제나라가 빼앗은 노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강제(姜齊)의 국조가 끝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제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전상이 죽고 그의 아들 전반(田盤)이 대를 이으니 그가 전양자(田襄子)이다. 전양자가 죽고 그의 손자 전화(田和)가 대를 이어 명목사의 군주에 불구하던 제강공(齊康公)을 바닷가로 유폐시키고 제나라 군주에 올랐다. 기원전 392년의 일이엇다. 

전화는 위문후(魏文候)에게 청탁하여 삼진(三晉)의 선례에 따라 주나라 천자가 자기를 제후로 봉해주도록 부탁하였다. 주안왕(周安王)이 위문후의 요청을 받아 기원전 386년에 전화를 정식으로 제나라 제후에 봉하였다. 그가 전태공(田太公)이다. 제나라의 첫 군주인 강태공의 이름에 성만 바꾼 것이다. 이때부터 강제(姜齊)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제(田齊) 시대가 열렸다. -출처 :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박인수 지음, 석필, p.195~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