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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조는 건국 초기 수도인 장안과 그 근기 지방에 대해서는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관동 지역에는 제후를 분봉하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혼합 형태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제후들은 통치 지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리하였으며 한의 율령에도 예속되지 않았다. 초기 한 왕실이 직접 장악한 군은 서부지역의 15개 군이었고, 관동 지역에 10개의 세습 왕국이 존재하였다.   
 
:한 고조는 건국 초기 수도인 장안과 그 근기 지방에 대해서는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관동 지역에는 제후를 분봉하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혼합 형태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제후들은 통치 지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리하였으며 한의 율령에도 예속되지 않았다. 초기 한 왕실이 직접 장악한 군은 서부지역의 15개 군이었고, 관동 지역에 10개의 세습 왕국이 존재하였다.   

2016년 5월 12일 (목) 00:42 판

역사

통치체제

통치사상

황로사상

국가유교

군현제

한 고조는 건국 초기 수도인 장안과 그 근기 지방에 대해서는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관동 지역에는 제후를 분봉하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혼합 형태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제후들은 통치 지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리하였으며 한의 율령에도 예속되지 않았다. 초기 한 왕실이 직접 장악한 군은 서부지역의 15개 군이었고, 관동 지역에 10개의 세습 왕국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향한 황제의 야욕은 분명했으며, 정국이 안정되자 반란의 혐의를 씌워 이성제후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제후의 자리는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는데, 고조 말기 제후국 장사국 하나만이 유일한 이성 제후로 남아있었다.
경제 때 조조는 경제와 함께 삭번책을 추진한다. 삭번책이란 동성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영지 삭감책으로, 이것은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된 제후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오초칠국의 난을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 왕실과 다른 제후국들의 도움으로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그 후 제후왕의 지위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경제의 뒤를 이은 한 무제는 추은령(推恩令)을 실시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시작하였다. 기존에는 제후가 죽으면 적장자가 그 자리를 계승했는데, 추은령 반포 후 적장자 외의 아들들도 토지를 물려받고 제후가 되었다. 이는 결국 기존 봉건국의 세력이 쪼개어지면서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제후들이 종묘 제사에 바치는 황금의 양이 부족하거나 기준에 미달하면 작위를 거두는 등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켰다. 제후가 기존의 정치 권력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자 漢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갔다.

사회제도

조세수입 확보수단

한 무제는 즉위 후 흉노족에 대해 기존의 화친 노선을 버리고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흉노와의 전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며, 문제와 경제 때 이루어 놓은 막대한 국부가 점차 소진되어갔다. 이에 문제는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각종 정책을 실시하였다. 주요한 정책으로 소금과 철의 전매와 평준균수법이 있다.
소금 전매
인간 생존의 필수품이자 식품보관 및 조미료로 활용되는 소금을 국가에서 판매를 독점하였다. 전국에 36곳의 염관을 설치하고 소금의 생산, 운송, 판매의 각 단계에서 세금을 징수하였다.
철의 전매
한 대에 들어서는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농기구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철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민중들에게 철제농기구는 필수품이었는데, 국가에서는 48곳의 철관을 설치해 철의 생산과 운송, 판매를 독점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평준균수법
재정 확충을 위해 한 무제는 평준법과 균수법을 시행하였다. 평준법은 상품의 가격이 저렴할 때 매입하여 가격이 오르면 내다팔아 그 차익으로 재정을 확충하는 정책이고, 균수법은 각 지방의 산물들을 조세로 징수하고 이를 다른 지방에 판매함으로써 재정을 확충하려한 정책이다.

외교

흉노와의 외교정책

실크로드

사회

문화

왕소군

개요

한나라 원제 때의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중국의 ‘4대 미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원제의 궁녀로 있다가 후에 흉노의 선우였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 처가 된다.
이름은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이며, 훗날 태조 문황제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불리기도 했다.

생애(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한궁추의 내용을 중심으로)

생애 (가장 대중적인 한궁추를 중심으로) 한 원제는 모연수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모집한다. 왕소군이 궁녀로 발탁되었으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내내 냉궁에 있다가 우연히 원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하라고 명한다. 모연수가 흉노에 투항하여 왕소군의 미인도를 선우에게 바치자 선우는 왕소군을 요구하며 화친을 제안한다. 원제는 전쟁을 불사하지만 신하들이 화친을 주장하여, 결국 왕소군은 흉노 땅에 보내진다. 원제와 이별한 왕소군은 원제를 위해 술을 뿌리고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호한야선우는 충절에 감동하여 장례를 치를 후 모연수를 한나라로 보내고, 원제가 끝내 그를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리텔링

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