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의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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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6598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5월 15일 (일) 17: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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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란, 당나라 태종#당 태종 이세민의 제위기간을 말한다. 태종은 제위에 오른 후 연호를 정관으로 바꾸었고, 그의 제위기간동안 국력이 강성하고 경제적으로도 번영하여 전성기를 누렸기에 이를 일컬어 정관의 치라고 한다.

태종이 정관의 치라고 불릴만큼의 올바른 정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의 기반은 우선 그의 인재등용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종은 인재등용에 있어서 민족이나 의견에 상관없이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까지 포용하고 자신의 신하로 등용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특히 그에 대한 대표적 인물이 위징이라는 인물인데, 자신과 제위를 두고 다투었던 건성쪽의 핵심인물로 정관의 치라고 불리는 태종의 제위기간을 만든 인물 중 하나이다.

이 시기의 업적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율령격식 형태의 법 개념 완성을 통해 국내체제를 정비했다. 637년 정관율령격식을 편찬함으로써 종래의 법 개념을 율령격식의 형태로 완성했다. 율령 체제란 형법인 율과 행정법인 령을 근본법으로 하는 성문법 체제이고 이미 진율, 한율이 존재했었다. 이에 격이라는 율령의 보충 규정과 식이라는 율령의 시행 세칙을 보완하여 율령격식 형태의 법체계를 정비해 낸 것이다. 세부 내용으로는 3성 6부제를 통해 권력을 분배하여 입법 · 심의 · 집행의 역할을 배분하여 중앙관제를 정비했고, 18세 이상의 남성에게 토지를 고르게 나누어주는 균전제의 실시를 통해 토지제도를 정비했다. 이런 분배된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추출하여 국가 재정의 기반을 닦는 조용조제의 실시를 통해 세제를 정비하고, 농민들이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쟁이 일어나면 출병하는 부병제를 통해 병제까지 정비했다. 이는 이민위본이라는 태종의 사상적 기반에 기초하여 시행된 것으로 법률이 백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며, 백성을 위한 정치 백성의 고충을 경감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국내체제를 정비한 태종은 나라 바깥으로 시야를 돌렸다. 북방 돌궐의 분열을 유도하여 세력을 약화시키고 서방 토욕혼과 서남 토번, 멀리 서역까지 정복함으로써 이민족 추장들로부터 '천가한'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천자인 동시에 가한인, 즉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라는 의미였다. 이로써 중국은 화이대동의 명실상부한 세계제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복활동을 통해 110개의 방이 남북 11개, 동서 14개의 도로를 중심으로 격자형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세계제국 당의 수도인 장안성에는 활발한 비단길의 동서교역, 조공 무역을 통해 들어온 세계 각지의 진기한 물건들로 가득 찼다. 이렇게 호한 융합의 모습을 보여준 당제국의 개방성과 당태종이 이룩한 국력의 성장은 강대국 중심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즉 조공과 책봉제도가 다시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태종의 정복정책은 이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던 고구려에게까지 펼쳐졌다.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문책한다는 이유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고구려 서북방의 요충지 안시성에서의 군민들의 저항에 실패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안시성 전투이다. 철수하던 태종은 격심한 악천후를 만나 전쟁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 이후에도 재차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태종은 대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5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