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

ChineseWiki
Mhb94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12월 23일 (금) 18:06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토지개혁의 의미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지주제를 폐지하고 토지를 경작농민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경자유전론(耕者有田論)이 대두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봉건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로의 이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봉건제에서 봉건적 귀족 계급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지주 계급을 겸하고 있었고 이러한 귀족적 계급들의 경제적 기반을 뒤흔들지 않는 이상 법 앞에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허울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아시아 각국의 정부는 이러한 지주들의 토지를 회수하여 실제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일에 큰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이처럼, 토지개혁(또는 토지혁명)은 봉건주의적 지주 계급을 타파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그들의 실제적인 민주적 힘을 배양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살펴볼 중국의 토지개혁도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토지개혁과 토지혁명

지주들의 토지를 회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방법에 있어서 대한민국, 일본, 대만은 유상매수/유상분배의 방법을 취한 반면 북한, 중국, 베트남은 무상몰수/무상분배의 방법을 취하는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유상매수를 자본주의 방식, 무상몰수를 사회주의 방식이라고 대비시키는 관행이 곧 정착되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당국자도, 현재의 연구자도 이를 각각 "농지개혁"과 "토지개혁"으로 불러 양자 모두를 "개혁"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사실 지주 토지를 몰수하는가 매수하는가에 따라 구사회의 지배계급인 지주의 물적 기반이 단절되느냐 연속되느냐가 달라지기 때문에 전자는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후자는 개혁적 성격을 가진다.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의 경자유전은 공산당의 주도하에 1946년 5월 공식적으로 개시되어 1952년 12월 완료되었다. 그 결과 3억 명의 농민에게 7억 무(1무=610㎡)가 분배되었고, 이렇게 분배된 면적은 당시 전체 경작지의 44%였다. 공간적으로 보면 화북의 공산당 지배구역에서 시작되어 중국 내전의 형세에 따라 점차 화중과 화남으로 확대되었다. 전 인구의 2/3가 거주한 화중과 화남은 토지개혁법의 적용을 받았다. 이 과정은 5ㆍ4지시(1946.5)의 온건노선, 토지법대강(1947.10)의 급진노선, 토지개혁법(1950.6)의 온건노선을 거쳐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시기를 몰수냐 매수냐의 기준에 따라 다시 구분하면 토지법대강을 전후하여 둘로 나눠진다. 즉, 1기(5ㆍ4지시)는 죄악이 큰 친일파의 토지만 몰수하고 지주 일반의 토지에 대해서는 농민의 직접 매매와 정부의 유상매수를 허용한 반면, 2기(토지법대강)와 3기(토지개혁법)는 지주 일반의 토지를 모두 무상몰수 하였다.

토지제도의 변혁, 곧 지주제를 철폐하고 경자유전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는 몰수와 매수의 차이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그 대상이 '토지' 일반인가 그 중의 일부인 '농지'인가의 차이도 있다. 그러나 이 범위의 문제도 실은 방법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동돼 있어서 몰수는 토지 일반을, 매수는 농지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에 관한 이견은 '혁명'과 '개혁'의 차이로 표현될 만큼 컸다. 예컨대 방기중은 일제하의 한국에서 모색된 토지문제 해결의 방법을 사회주의 계열의 "토지혁명론"과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토지개혁론"으로 나누어 대비시켰다. 이때 무상몰수ㆍ무상분배를 토지혁명론으로, 유상매수ㆍ유상분배를 토지개혁론으로 규정하였다. 반면, 신기욱은 토지에 대한 운동을 농민대중의 주체적 운동을 기준으로 삼아 '개혁'이란 국가가 정책과 법제에 의거해 실현하는 것이고, '혁명'이란 농민의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도전에 의해 실현하는 것으로 대비시켰다. 이처럼 토지제도의 변혁을 위한 방법이 혁명적인가 개혁적인가 하는 논의는 학자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방기중의 논리를 따라 토지제도의 변혁 방법에 대한 성격을 논의할 때에는 토지일반에 대하여 무상몰수이면 토지혁명으로, 유상매수이면 토지개혁으로 규정하기로 한다. 하지만 각 시기의 중국 토지제도의 변혁을 논의할 때에는 중국공산당사에 의거한 통설에 따라 토지혁명기(1927-37)-감조감식기(1937-45)-토지개혁기(1945-52)으로 구분하기로 한다. 雇

토지혁명기(1927-37)

이 시기는 흔히 소비에트 혁명기라고 불린다. 1927년 4월, 중국의 국민당이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국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의 추격을 피해다님과 동시에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얻기 위해 통치구역에 대해서 과감한 토지혁명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 공산당은 노농병 대표로 구성된 소비에트 정부의 혁명수단을 통해 공유지 및 지주와 부농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혁명은 1931년을 기점으로 그 양상이 조금 달라지는 데 1931년 전에는 지주를 비롯하여 부농들의 토지까지 무상몰수하고 그렇게 분배된 토지는 전부 국유로 하였으나, 후기에는 지주의 토지와 부농의 출조(出租)토지만 몰수하고 부농의 자경지(自耕地)와 고용인들을 통한 경작지는 보존하였으며, 분배된 토지에 대한 농민의 소유권도 인정하였다. 1931년 이후의 이러한 토지혁명의 양상은 훗날 항일전쟁 이후의 토지개혁에도 이어진다.

감조감식기(1937-45)

토지제도의 변혁과 관련해서는 감조감식기이지만 이 시기는 제2차 국공합작과 동시에 항일전쟁을 수행하였던 시기이다. 때문에 토지제도의 변혁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과격한 혁명적 노선을 따르기보다 온건한 개혁적 방식을 택하게 된다. 사실 감조감식이라는 정책은 제1차 국공합작시기(1924-27)에 국민당에서 시행하려던 농민정책이었으나 항일전쟁기에 중국 공산당이 자기들 세력하에 있는 지구에서 소작료 25%를 인하한 감조(減租)와 부채이자 15%를 인하한 감식(減息)을 실시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지주층이나 부농층도 항일전에 동원하기 위하여 그때까지 주장해 오던 지주 소유의 토지를 몰수, 농민에게 분배하던 정책을 일시 중지하고, 감조감식을 실시하여 지주·고리대금업자 등이 농민에 대한 봉건적 소작료를 경감함과 동시에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유지를 꾀하였다. 이러한 감조감식의 정책은 기존에 중국 공산당이 견지하였던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토지혁명과 상당히 대비되는 온건적 토지정책이었으나, 항일전쟁 이후의 토지개혁과 항일전쟁 전의 토지혁명을 이어주는 과도기로서의 토지정책으로서 감조감식을 이해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 중 프리드먼은 항일전쟁기의 감조감식 정책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르면서 전쟁 후의 토지개혁은 그 위에 단지 계급투쟁의 폭력이 추가되었을 뿐이라고 파악하였다. 감조감식의 결과 토지수익성이 감소하자 지가도 하락하였으며, 소작농은 그 틈에 쉽게 지주의 토지를 구입할 수 있게 되어 사실상의 토지개혁의 효과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본 것이다.

토지개혁기(1945-52)

5ㆍ4지시(1946.5)

항일전쟁이 끝난 후에도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감조감식의 방침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자기 지배구역의 일부에서 농민들로부터 경자유전 요구가 제기되자 공산당은 1945년 말부터 친일파의 토지를 몰수하여 염가(시가의 최하 10%- 최고 50%)로 농민에게 매각한다는 정책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도 춘경기의 도래와 함께 커진 농민들의 토지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이에 공산당은 진일보한 정책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회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내용의 5ㆍ4지시를 발표한다.

  1. 몰수. 오직 "죄악이 큰 친일파"의 토지와 재산만 몰수한다. 이는 친일파 청산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2. 청산. 고율 소작료와 고리대, 도량형 속임, 약탈 등을 비롯한 각종 부당한 수단에 의해 농민의 부를 수탈하거나 약탈한 내역을 조사하여 돈이 아니라 토지로 상환토록 한다. 이 투쟁의 대상은 지주ㆍ부농 일반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향촌의 권력을 직접 장악하거나 그에 의지해 농민을 압박하고 수탈한 권세가들이다.
  3. 매매. 감조감식으로 불리해진 지주가 토지를 팔 경우 소작농이 우선권을 갖고 매입한다.

그리고 이상의 세 방법으로 토지를 획득할 때, 부농의 토지 는 보존하고 중소지주를 대지주와 구별해서 배려해야 한다는 원칙도 명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