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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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钗)> -죽기 전 일본에 가시를 드러낸 13송이 꽃
<사진1> 장의사 역할 '존'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 <사진 2> 수녀원 학교의 소녀들과 홍등가 여인 사이의 묘한 긴장감

전쟁을 표현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준이 애매모호한 점이 있지만, '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钗)'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려낸 영화다. 피해자 중에서 자기 보호 능력이 성인보다 부족한 13명의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배경은 1937년 12월 13일, 바로 중국이 잊을 수 없는 아픔인 '난징대학살'이다. 진링(金陵)은 바로 난징의 옛 이름이다. 영화 초반에 일본 군대와 중국 군대의 싸움에서 일본이 중국 대륙을 깊이 침략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중국 군인들의 부상이 난무하고 성당으로 피신하는 것에서 중국이 밀리고 있다는 것도 보인다.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이 난징까지 닿고, 수녀원 학교의 소녀 13명은 피난을 미처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폭격 속에서 윈체스터 대성당에 급히 피신한다. 그들은 세상을 떠난 잉글먼 신부의 장례를 위해 장의사를 기다리는데, 장의사 존(크리스찬 베일)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성당에 도착한다. 게다가 일본군을 피해 홍등가 여인 13명에 중국군 부상병들까지 성당에 숨어든다.

<사진 1>에서 보면 크리스찬 베일은 미국인 장의사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직접 전쟁과 관련된 중국인과 일본인 외에도 미국인이 나온다는 점이다. 아마 감독 장예모(張藝謀)는 당시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이용함으로서 난징 대학살이 얼마나 잔혹한 만행이었는지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난징 대학살 때는 미국, 영국, 독일의 외교관 저택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교회나 병원 같은 곳이 약탈되었다. 홍등가 여인들이 존이 '미국인'이라는 점을 가지고 난징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과 모순되는 부분이다. 미국인을 죽이면 일본인이 전쟁에서 불리할 수 있다는 생각과, 실제로는 국적 불문하고 만행을 저지른 일본. 진링의 13소녀에서는 또 다른 국가의 등장으로 그 만행의 정도가 심화되어 보인다.

또 다른 특징은 배경이 '성당'이라는 점이다. 임시로 만든 거처가 아니라 종교적 장소라 할 수 있는 성당을 배경으로 제시함으로써, <사진 2>와 같이 영화는 인물들 간 동거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극대화하는 동시에 난징 학살이 왜 '만행'인지 보여줄 만한 역사적 사실을 제시한다.

<사진 3>, <사진 4> 영화에서는 적십자 조약이라도 불리는 제네바 조약에 성당이 해당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 중반부에서 일본군이 칼로 적십자 기(旗)를 자르는 모습은, 일본군이 이를 무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군의 인간성 상실을 표현한다.

<사진 3>과 <사진 4>에서는 적십자 모양이 나오는데, 이는 제네바 협약에 성당이 들어감을 보여준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의 참혹성을 최소한 하기 위한 협약이었다. 만약 전쟁 중 성당에 누군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비인도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 소녀 13명이 필사적으로 도망친 이유도, 홍등가 여인들이 어떻게든 성당으로 들어오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당이 배경이라는 점이 이 영화만의 특징인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인물들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그 인물들 중에서도 홍등가 여인들과 장의사 존과 성당은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속물이 베면 안 되는 성당과 속물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이 인물들의 모습은, 소녀들과 인물들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은 것은 아니라는 현실성을 보여준다.

장의사와 홍등가 여인들의 속물적인 모습은 오히려 인간적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소녀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에 답답할 수도 있고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처음부터 행하지 않음에 어이없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처음부터 영웅적 면모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전쟁 속에서 처음부터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나부터 살고 보자는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질 근본적 욕망으로 비춰진다. 이 영화에서는 안전지대로 보호받아야 마땅한 성당을 일본군이 무력으로 위협하면서 존의 '분노'를 그려낸다. 바로 존을 비롯한 여인들이 영웅적 면모를 가지게 되는 전환점인 것이다.

<사진 5>, <사진 6> 소녀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잔치에서 불러줄 것을 청한 일본군. 그러나 일본군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의 만행에 서로를 도와주면서 이 세 인물은 정이 든다. 문제는 일본군이 어느 날 수녀원에서 소녀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일본군 잔치에서 노래 불러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문제는 잔치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아챈 존과 여인들은 고심하다가 여인들이 소녀 복장을 하고, 소녀들 머리로 바꾸고 소녀들을 대신해 일본군 잔치에 간다. 만약 단순히 무기를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면 항일 정신을 보여주는 영화에서 끝났겠지만, 소녀들을 대신해 희생당하는 여인들은 일본군의 만행을 극대화하면서도 제목처럼 '꽃다운' 저항을 보여준다. 존과 여인들은 알고 있었다. 소녀들이 성당 밖으로 나가서 노래를 부르면 끝나고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이 사실은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만행 중 하나인 '위안부'와도 겹친다. 소녀들 13명을 대신하는 홍등가 여인들. 이들은 모두 진링의 13소녀인 것이다. <사진 5>와 <사진 6>에서는 그 모습이 잘 나타난다.

일부 비평가들은 중국을 너무 미화했다는 평을 남기기도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만큼, 감독 장예모가 부분적으로 보여준 현실적 장치는 이 영화만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진링의 13소녀는 수녀원 학교의 소녀들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을 위해 같은 모습으로 위장해 희생당한 여인들과, 신부의 역할로 아이들을 지키고자 한 존을 모두 포함한다. 영화 포스터에 단순히 아이들만 그려지지 않은 이유도 이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비록 늦게 개봉되었고 청소년들은 볼 수 없지만, 중국의 역사를 단순한 전쟁 역사가 아니라 아픔의 역사로 표현한 영화인만큼,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