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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이었지만 1970년 자아비판과 함께 숙청되었다. 천보다는 일찍이 1930년 후반에서 1940년 초 옌안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의 결합으로서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체계를 정식화해내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당내 공식노선으로 정립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고, 옌안 정풍운동을 통해 당내 마오의 이론/이데올로기적 위치를 견고하게 만든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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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이었지만 1970년 자아비판과 함께 숙청되었다. 천보다는 일찍이 1930년 후반에서 1940년 초 옌안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의 결합으로서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체계를 정식화해내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당내 공식노선으로 정립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고, 옌안 정풍운동을 통해 당내 마오의 이론/이데올로기적 위치를 견고하게 만든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마오쩌뚱 선집『의 편집자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골간인 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과 헌법안을 작성한 인물이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오면 문혁의 핵심 강령이라 할 수 있는 <문혁 16조>의 초안 또한 그가 작성하였으며 중앙문혁소조 의 소조장을 맡았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백승욱, 「천보다를 통해 본 중앙문혁소조와 문화대혁명」
 
백승욱, 「천보다를 통해 본 중앙문혁소조와 문화대혁명」

2018년 8월 24일 (금) 21:17 판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이었지만 1970년 자아비판과 함께 숙청되었다. 천보다는 일찍이 1930년 후반에서 1940년 초 옌안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의 결합으로서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체계를 정식화해내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당내 공식노선으로 정립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고, 옌안 정풍운동을 통해 당내 마오의 이론/이데올로기적 위치를 견고하게 만든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마오쩌뚱 선집『의 편집자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골간인 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과 헌법안을 작성한 인물이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오면 문혁의 핵심 강령이라 할 수 있는 <문혁 16조>의 초안 또한 그가 작성하였으며 중앙문혁소조 의 소조장을 맡았다.

참고자료

백승욱, 「천보다를 통해 본 중앙문혁소조와 문화대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