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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년

조비가 황제에 즉위한 후 헌제가 화를 입었다는 소문이 전해지니, 선주(先主-유비)-삼국지에서는 위나라가 한나라를 이어받았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유비를 황제로 칭하지 않는다-는 상복을 입고 시호를 추존하여 효민황제(孝愍皇帝)라 하였다.

이 때에 의성태수였던 맹달은 방릉을 점령하고 상용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유비는 맹달이 힘에 부칠 것을 염려하여 유봉을 보내 상용을 점령하고 맹달의 군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맹달은 유봉이 자신의 공을 가로챘다고 생각하여 그와 다투며 화합하지 못하였다. 관우는 번성을 포위하며 유봉과 맹달에게 지원군을 보낼 것을 요청하였으나, 유봉과 맹달은 아직 군의 기강을 잡지 못하였다며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관우가 패배하여 참수당하였는데, 이 와중에도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는 등 그들은 다툼을 멈추지 않았고, 유비는 이 일로 크게 분노하였다. 결국 맹달은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식솔과 부하들을 인솔하여 위로 투항하였다. 맹달은 결국 다시 위나라의 편에 서서 상용을 공격하게 되는데, 유봉에게 “만일 그대가 마음을 돌려 위나라에 의지한다면, 비단 우리와 동료가 되어 3백 호의 봉록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나국(羅國)의 뒤를 이을 것이고, 응당 진일보하여 큰나라를 영지로 삼도록 하여 초대 군주가 되게 할 것입니다. 폐하의 대군은 이미 전쟁북을 두드렸으며, 촉과 오를 압박하기 위해 수도를 완(宛)과 등(鄧)으로 옮기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 두 적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군대는 돌아올 기한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 기회에 일찍 좋은 계획을 결정해야 합니다.” 라며 자신과 같이 투항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유봉은 맹달에 말에 따르지 않았고, 신의, 신탐 형제의 배신 때문에 패배하여 성도로 귀환하였다. 평소 제갈량이 유비에게 후계자 문제를 없애기 위해 유봉을 제거할 것을 권해왔으므로, 유비는 맹달과 화합하지 못하고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봉에게 자살하도록 하였다. 유봉은 죽어가며 말했다. "맹자도(孟子度 : 맹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유비는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 221년

4월에 성도 무담의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건안 26년(221년) 4월 병오일, 황제 유비는 감히 현모(玄牡-희생용 검은 소)를 써서 황천(皇天)의 상제(上帝)와 후토(后土-땅)의 신기(神祇-천신과 지신)에 밝게 고합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해 역수(歷數)가 무궁했으나, 일찍이 왕망이 찬역하자 광무황제가 진노하여 이를 주살하고 사직을 다시 보존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무력에 의거하여 안인(安忍-잔인한 짓을 예사로 저지름)하니, 주후(主后)를 육살(戮殺-살륙)하고 도천(滔天-하늘에 차고 넘칠 정도로 죄악이 큼)하게 중국을 망치며 천현(天顯-하늘의 뜻)을 되돌아보지 않았고, 조조의 아들 조비는 흉역한 마음을 품고는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했습니다. 군신(群臣-뭇 신하), 장사(將士)들이 이르길, 사직이 무너지려 하니 저 유비가 응당 이를 닦아 2조의 대업을 잇고 천벌을 공행(龔行-봉행)해야 한다 했습니다. (중략) 번예(燔瘞-제사물품)를 마련해 천신(天神)께 고류(告類-황제나 황태자 즉위식 등 때에 행하는 제사의식)하니, 신들께서는 흠향하시고 한가(漢家)에 복을 주어 사해를 영원히 평안케 하소서!”

연호를 건원에서 장무(章武)로 고쳤다. 제갈량(諸葛亮)을 승상(丞相), 허정(許靖)을 사도(司徒)로 삼고, 백관(百官)을 두고 종묘(宗廟)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5월이 되자 오씨를 황후로, 유선을 황태자로 세웠다. 6월에 거기장군 장비(張飛)가 측근인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되었다. 둘은 장비의 목을 가지고 손권에게로 달아났다. 유비는 탄식하며 장비에게 환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비는 군자를 존경하였지만 소인배들에게는 가차없는 성격이었고, 선주가 늘 이것에 대해 말하길, “경은 형벌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친데 또 매일 장정들을 채찍질 하고는 그들을 좌우에 있게 하니 이것은 화(禍)를 초래하는 길이오.” 라고 하였으나 장비는 이를 고치지 않았다. 7월에 유비는 관우가 오나라에 의해 죽은 것에 크게 분노하여 오나라 토벌에 나선다. 선봉장 오반(吳班)과 풍습(巫縣)으로 하여금 무현과 자귀를 점령하도록 하자, 손권이 크게 놀라 화친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유비는 몹시 화내며 허락지 않았다.

  • 222년

유비는 효정에 주력을 주둔시키고, 무현에서 이릉까지 7백리 길에 길게 진영을 세우고 풍습을 대독으로 삼고 장남을 선봉으로 하여 오를 공격하도록 하였으니, 그 위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또한 마량을 통해 무릉의 만족을 아군으로 포섭하였다. 그러나 육손의 화공에 의해 길게 세운 진영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장남, 풍습, 사마가 등이 죽고 유비는 마안산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이내 육손에 의해 포위당하고, 유비는 겨우 백제성으로 퇴각하였지만 이 싸움으로 인해 거의 촉의 전군의 궤멸당했다. 유비가 백제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한 손권이 화해를 청하자 이번에는 유비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 223년

2월, 제갈량이 영안에 도착하자 유비는 제갈량에게 유선을 보필하도록 맡기며 4월에 사망한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유비는 자식인 유선이 모자란 인물이라면 제갈량이 촉나라를 이어받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제갈량은 죽는 순간까지 제위를 넘보지 않고 유선을 보필한다. 유비와 제갈량의 믿음이 이와 같이 깊은 것을 두고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말이 생겼다.[1] 제갈량은 유선이 제위를 세습받은 후, 무향후에 봉해져 대소사를 막론하고 촉의 모든 정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 225년

223년 남중에서 일어난 반란을 선주의 상중이기 때문에 진압하지 않고 있다가, 225년 봄에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가을에 모두 평정하였다. 남중에서 나오는 군수물자를 바탕으로 힘을 모으며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 227년

제갈량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의 한중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이에 앞서 유선에게 상소하니, 이것이 그 <출사표>이다.[2] 그리고는 출병하여 면양에 주둔하였다.


  • 228년

제갈량은 야곡도를 걸쳐 미를 공격하려 한다고 거짓 소문을 낸 뒤, 조운과 등지로 하여금 기곡을 주둔시켰고 위의 대장군 조진이 군을 이끌고 방어에 나섰다. 그 새 제갈량이 몸소 군을 이끌고 기산을 공격하니 남안, 천수, 안정이 촉으로 돌아섰고, 강유는 천수태수에게 의심받는 것을 알자 양서, 윤상 등과 함께 제갈량에게 항복했다. 이 때 논자들은 마땅히 위연이나, 오의 등이 선봉을 맡아야 한다고 거듭 말했으나, 제갈량은 평소 신임하고 있던 마속에게 선봉장을 맡긴다. -선주는 평소 마속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이 그 실제를 과장하니, 크게 기용할 수 없소. 그대가 이를 살펴보시오.”라고 말하였으나, 제갈량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무시하고, 또 부장인 왕평의 조언도 무시한 채 산에서 농성하는 것을 택했다가 장합에 의해 대패하였고, 제갈량은 거점을 잃고 한중으로 귀환했다. 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 제갈량은 마속을 울면서 참수했다. [3] 이에 제갈량은 마속을 믿은 자신의 잘못이므로 벼슬을 낮추어 달라고 상주하여, 우장군으로 낮추어졌으나 촉의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은 그대로였다.

제갈량이 평정했던 남안, 천수, 안정의 3군은 조진과 장합에 의해 다시 위에 평정되었다. 겨울이 되자, 제갈량은 진창을 포위하였고 조진은 학소와 왕생으로 하여금 진창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 때 제갈량이 학소에게 동향 사람인 근상을 보내 설득하려 하자 학소는 “위나라의 과법科法이 어떤지 경이 익히 알 것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아실 것이오. 나는 국은國恩을 크게 입어 문호門戶가 귀하게 되었으니 경이 말을 더할 것도 없이 오직 죽음을 각오할 뿐이오. 제갈량에게 돌아가 빨리 공격하라고 전해 주시오.” 라고 하였고, 그를 재차 설득하려 하였으나 “전에 한 말로 이미 정해졌소. 나는 경을 알아도 내 화살(箭)은 경이 누군지 모르리” 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제갈량은 진창성을 20일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하게 된다. 왕쌍은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적하였으나 오히려 제갈량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한다.

  • 229년

제갈량은 세 번째로 북벌을 감행하여 진식을 보내 무도와 음평을 공격했다. 위의 옹주자사인 곽회가 이를 격퇴하려고 나서자, 제갈량이 직접 출진하니, 곽회는 퇴각하였고 마침내 두 군을 평정하였다.

  • 231년

2월, 제갈량은 네 번째로 군사를 보내어 기산을 포위하였다. 이 때 산길이 험난하였으므로 목우-<삼국지연의> 102회에는 ‘물과 음식이 필요 없으므로 밤낮으로 운반을 계속할 수 있고, 흡사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고, 산을 오르내리는데 너무나 편리할 뿐만 아니라, 정교한 장치가 있어 목우와 유마의 입 속에 있는 혀를 돌리면 곧바로 움직이지를 못했고, 혀를 비틀어 놓으면 다시 움직인다.’ 라며, 마치 반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되었으나, 실제로는 물건을 간편하게 운반할 수 있는 일륜거의 형태를 띄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를 통해 물자를 수송했다.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가비능을 부르자, 그는 성성에 도달하여 그에 호응하였다. 위 명제는 대사마 조진이 병이 들어, 사마의로 하여금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지휘하게 하였다. 장합은 제갈량을 기습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사마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방어를 굳혔다. 5월,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요청하니 사마의는 장합으로 하여금 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제갈량을 공격하였다. 제갈량이 위연, 고상, 오반을 시켜 공격을 막아내자, 사마의는 다시 영채로 돌아가 출격하지 않았다. 군량이 떨어진 제갈량이 귀환하려 하자 사마의는 장합으로 하여금 추적하게 한다. 장합은 사마의를 추격하다가 화살을 맞고 죽는다.

  • 234년

2월,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야곡을 걸쳐 출병하여 오장원을 잠거하고, 사마의와 위남에서 대치하였다. 제갈량은 늘 군량 때문에 북벌에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군사를 나눠 둔전하며 오랫동안 주둔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서로 대치한 지 한참이 지나, 9월이 되어 제갈량이 54세로 군중에서 사망한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사자에게 제갈량이 어찌 생활하느냐고 물었을 때 사자는 “제갈공께서는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드시고, 20대 이상의 벌은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먹는 음식은 몇 승(升)도 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사마의는 “제갈량이 곧 죽겠구나.”라고 하였다.-사마의는 촉군이 퇴각한 후 제갈량의 영루와 처소를 둘러본 뒤,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말하였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죽음을 확신하고 후퇴하는 촉군의 후미를 쫓자, 강유는 양의로 하여금 등을 돌려 사마의를 공격하는 척 하였다. 사마의는 놀라 군대를 후퇴시켰고,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은밀하게 양의, 비의, 강유와 함께 자신의 사후 퇴군할 방법에 대해 말하니, 위연이 뒤를 끊고 강유가 그 다음에 서며, 위연이 명령에 불복하더라도 그냥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평소 용맹하고 교만한 위연을 피하고 양보하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양의는 위연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므로, 둘의 사이는 마치 물과 불 같았다. 평소 제갈량은 양의의 재간을 아끼고, 위연의 효용에 의지하니 둘의 사이가 이와 같은 것을 근심하면서도 차마 어느 한 쪽을 버리지 못하였다. 양의가 제갈량이 사망한 것을 숨기고 위연에게 비의를 보내 의중을 떠보니, “승상이 비록 죽었어도 나는 건재하오. (승상)부의 가까운 관속들은 곧바로 상여를 운구해 되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하더라도 나는 응당 제군을 이끌고 적을 공격해야 하오. 어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천하의 일을 폐하라 하시오? 더구나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가 부륵(部勒-부서를 정하여 배치함)한 바에 따라 뒤를 끊는 장수가 되겠소!”라 하였다. 양의 등이 제갈량의 유언대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가자 위연은 분노하여,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앞질러 가 길을 불태워버렸다. 이에 양의와 위연이 서로 반역했다고 표를 올렸는데 장완, 동윤 등은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하였다. 양의는 위연의 군대를 추격하여 왕평을 내세워 맞서는데, 위연의 군대는 위연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싸우지 않고 도망갔다. 위연은 아들들을 데리고 한중으로 도망하였지만 마대에 의해 사로잡혀 참수당한다. 양의는 위연의 수급을 짓밟고 마침내 그의 3족을 멸한다. -진수는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하고 싶어 했을 뿐, 반역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 와중에 평소에 미워하던 양의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양의는 이제 자신이 제갈량의 뒤를 이어 정무를 총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제갈량은 성미가 편협한 비의가 아닌 장완을 상서령에 임명하니 양의는 자신이 장완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원한과 울분을 드러내고 다니니 사람들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 그를 피하였다. 오직 비의만이 그를 위로하였는데 양의가 그에게 “지난 날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약 군을 들어 위씨(魏氏-위나라)에게 갔다면 내 처지가 어찌 이처럼 추락했겠소! 후회해봤자 다시 어찌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니, 비의는 몰래 이 일을 상표하였다.

  • 235년

이 일로 중군사였던 양의는 관직을 잃고 평민의 신분으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양의는 유배지에서도 계속하여 상서를 비난하는 말을 하니, 그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자살해버렸다.

  • 249년

조상이 죽자 자리가 위태로워진 하후패가 망명하려 하자 사람을 보내 맞이하였다. 유선은 하후패를 후히 대접하며 거기장군에 임명하였다.

  • 253년

위나라에서 거짓 투항한 장수 곽순이 연회에서 술에 취한 비의를 주살하였다. 평소에 강족을 꾀어내 농서지방을 빼앗을 계획을 하고 있던 강유는 이를 말리던 비의가 죽자 곧바로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남안을 포위했다. 그러나 위의 옹주자사인 진태가 도착하고, 병량이 떨어지자 이내 퇴각하였다.

  • 254년

강유가 장억을 이끌고 또다시 농서로 출전하자, 농서의 적도를 지키던 이간은 바로 항복하였다. 장억은 이 때 걷기도 힘들 만큼 지병이 악화되어 있었지만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출전하며 유선에게 "신은 총명한 폐하의 세상에 살면서 과분한 은총을 받았으며 몸의 질병이 심해져 늘 하루아침에 죽어 은혜를 저버리게 될까 봐 늘 걱정했습니다. 하늘은 제 소원을 저버리지 않고 군사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만일 양주를 평정한다면 신은 국경 밖에서 지키는 일을 할 것입니다. 만일 이기지 못한다면 이 몸을 죽여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 라고 하니 유선이 눈물을 흘렸다. 장억은 서질과 싸우다가 죽었지만 배가 넘는 적을 격파하였다. 강유는 위나라 군을 대파하고 하간, 적도, 임조의 백성들을 데리고 귀환하였다.

  • 256년

8월, 강유는 장익과 위의 항장인 하후패를 데리고 북벌에 나섰다. 강유는 전에 평정했던 적도로 향했고, 옹주자사인 왕경이 진태에게 보고하자 진태는 왕경으로 하여금 적도로 가서 강유를 막게 한 뒤 진창으로 진군했다. 강유는 조서에서 왕경을 대파하고 적도성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진태와 등애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였고, 위군이 빨리 당도한 것에 놀란 강유는 군사를 몰려 종제에 주둔하였다. 강유는 기산으로 다시 진군하였으나, 등애가 기다리고 있자 동정을 지나서 남안으로 향했다. 등애와 무성산에서 대치하였으나 싸워 이기지 못하고 동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진서대장군 호제가 상규에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약속을 깨고 오지 않았고, 강유는 6월에 단곡에서 등애를 맞아 싸웠으나 대패하여 대부분의 장수와 병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 257년

유선은 평소에 환관인 황호를 총애하였으나, 동윤이 그의 사람됨을 알오보고 견제하였으니 나쁜 일을 저지르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뒤 진기와 함께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진기가 사망하자 황호는 비로소 정권을 장악하여 전횡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강유는 제갈탄이 난을 일으킨 틈을 타 다시 한 번 북벌을 감행한다. 강유가 망수에서 진영을 쌓고, 사마망과 등애는 위수 강가에서 방어하였는데, 사마망과 등애가 싸움에 응하지 않자 강유는 제갈탄이 진압당한 뒤 성도로 귀환했다.

  • 262년

강유는 또다시 군사를 이끌고 후화로 향했지만 또다시 등애에게 패배하였다. 황호는 이를 구실로 염우와 결탁하여 강유를 대장군직에서 내쫓으려 하였지만, 이를 눈치챈 강유는 답중에 주둔한 채 성도로 귀환하지 않았다.

강유는 유선에게 위가 공격해온다는 글을 올렸으나, 황호가 적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당의 말만 믿고 유선에게 그대로 고하여 아무도 대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종회와 등애가 군대를 밀고 들어오자 그때가 되어서야 요화 등을 보내 강유를 돕도록 하였다. 종회가 한중을 공격하자 모든 군이 한성과 낙성으로 물러나 방어를 굳혔다. 왕함은 낙성을, 장빈은 한성을 각각 수비했다. 그러나 종회는 관성을 함락시켜 군량을 확보하고 군사를 진격시켰다. 강유는 종회의 군대가 한중으로 들어선 것을 알고 한중으로 물러나는데 양흔이 강천구까지 추격하여 크게 싸웠다. 강유는 패하여 돌아가던 중, 제갈서가 교두를 막고 있는 것을 알고 공함곡을 통해 제갈서의 후방을 치려고 하였다. 제갈서는 이것을 듣고 30리를 후퇴하였다. 강유는 제갈서의 군대가 퇴각하자 교두를 통과하였고, 제갈서가 급히 돌아갔으나 하루 차이로 강유를 놓쳐버렸다. 장익과 동궐이 막 한수에 이르렀을 때 강유와 요화 또한 퇴각하다가 그들과 군을 합쳐 물러나 검각을 지키며 종회를 막았다. 종회는 검각을 뚫기 어렵고 또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매우 멀었으므로 귀환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등애는 음평의 경곡도를 걸쳐 면죽에서 제갈첨과 장준을 격파하였다. 등애가 갑자기 들어닥친 것에 놀란 유선과 신하들은 동맹인 오로 망명하거나, 남중으로 도망갈 것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초주는 “옛날부터 다른 나라에 기탁하고 천자로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 만일 오나라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신하가 되어 복종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 규율에 차이가 없으면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합칠수도 있는데, 이것은 자연스런 이치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말하면, 위나라는 오나라를 병탄할 수 있어도, 오나라는 위나라를 병탄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똑같이 신하가 된다면, 작은 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어떻게 큰 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과 비교하겠습니까? 오나라가 멸망한 후 다시 치욕을 받는 것이 어찌 한 차례 치욕을 받는 것과 비교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남쪽으로 도주한다면, 일찍이 계책을 세운 연후에야 실현될 수 있일 것입니다. 지금 강대한 적군은 가까이 접근했고 재화와 멸망이 도래하려고 하니, 소인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남쪽으로 출발할 때에는,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어떻게 남쪽으로 가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라며 항복할 것을 건의하였고, 유선은 망설이다가 초주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한 뒤 등애에게 투항을 청하였다. 유선의 아들 유심은 싸워보지도 않고 수치스럽게 항복한 것을 한스러워하며 처자식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등애가 성도에 도착하자 유선은 수레에 관을 싣고 스스로 몸을 묶은 채 그를 맞이하였다. 등애가 유선의 포박을 풀고 관을 불태운 뒤 회견하였다. 강유는 제갈첨이 격파되었을 때, 유선이 성도를 수비하거나 혹은 오로 도망하거나 혹 남쪽으로 도망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무엇이 진실인지 몰라 동쪽으로 군을 이끌며 진상을 파악하려 하였다. 유선이 강유에게 사자를 보내 종회에게 항복하도록 하자 강유는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투항하였다. 그러자 장졸들 중에서는 분한 마음에 칼을 뽑아 돌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강유는 종회와 가까이하며 소란한 상태를 만들어 종회와 수하들을 처리하고 다시 병권을 잡아 촉한을 부흥시키려는 계획을 하였으나,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종회와 함께 혼란한 도중에 죽임을 당한다. 유선은 전 가족이 위로 옮겨져 안락현공에 봉해졌으니, 이로써 촉이 멸망하였다. 유선은 271년 낙양에서 65세의 나이로 죽었다.

  1. 유비가 제갈량과 점점 친밀해지는 것을 관우와 장비가 언짢아하자, 유비가 그들에게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다는 것은 고기가 물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는 불평을 하지 말도록 하게(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2. (※ 출사표 出師表) “선제(先帝-이전 황제 즉 유비)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조(崩殂-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危急), 존망(存亡)의 때입니다. 그러나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성청(聖聽-임금이 귀로 듣는 것)을 널리 열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志士)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충간(忠諫)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관부)은 모두 한 몸이니 척벌장비(陟罰臧否-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유사(有司-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평명(平明-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시중(侍中), 시랑(侍郎)인 곽유지(郭攸之), 비의(費禕), 동윤(董允)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 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向寵)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軍事)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督)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영중(營中)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행진(行陳)을 화목(和睦)하게 하고 그 우열(優劣)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신(賢 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한 것이 바로 선한(先漢-전한)이 흥륭(興隆-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後漢)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侍中), 상서(尙書), 장사(長史), 참군(參軍)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포의(布衣-무명옷; 평민)로 남양(南陽)에서 몸소 밭을 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성명(性命-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문달(聞達-이름이 알려져 등용됨)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려(草廬)를 세 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구치(驅馳-분주하게 힘씀)할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傾覆)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危難)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유비가 제갈량을 찾아온 이래)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근신(謹愼-삼가고 조심함)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갑(兵甲-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노둔(駑鈍-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흉(姦凶)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구도(舊都-옛 수도, 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분(職分-직책과 본분)이며, 손익(損益)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遺詔)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表)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3. 읍참마속(泣斬馬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