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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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님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11월 29일 (일) 01:42 판 (난징총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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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부

총통부란?[1]

총통부는 통상적으로 공화제국가에서 총통의 관저나 사무실의 소재지를 가리키며, 국가의 정치권력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남경 총통부는 수차례 중국정치군사의 중심지, 중대사건의 발원지로서 근대중국역사의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1300년대인 명나라 때 이곳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는 귀덕후부, 한왕부였고 청나라 때는 강녕직조서, 강남총독서, 양강총독서였다.

총통부의 역사[2]

1853년 태평천국 군사들이 난징을 점령한 후 ‘하늘의 수도’라는 뜻의 천경이라 개칭하고 수도로 삼았다. 천왕 홍수전이 이곳에 천조궁을 세웠다. 홍수전은 광동성 출신의 유생으로서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 주장하며 상제회(上帝會)를 창설해 청대 말 문란한 혹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사유재산, 전족, 아편과 술을 금지하고 토지제도 개혁과 남녀평등을 주장했는데, 기독교 이념을 표방한 것이어서 서양열강의 이목을 끌었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과 상제회가 강서성 금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1852년 호남성 장사 공략에는 실패했으나, 1853년 1월 호남성 무창 공략에 성공하고 이어 3월에 남경을 함락한 후 14년 간 강남 지역을 통치했다. 하지만 천왕 아래 다섯 왕들 간의 불화로 1864년에 멸망했다.

1864년 청나라 군사들이 난징을 수복하고 천조궁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천조궁은 청의 군대에 다시 함락되어 파괴되었다가 1870년에 재건되었다. 그 후 이곳은 양강(兩江)총독서의 역할을 했는데 임칙서, 증국번, 이홍장 등이 이 곳에서 총독으로 있었다. 증국번과 이홍장 등이 강소, 절강, 강서, 안휘, 상해 등을 총괄 통치하던 강남통치의 최고 수뇌부였다.

신해년에 일어난 공화혁명은 각 성이 청조로부터 독립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임시정부 조직대강에 의해 마련된 새 정부는 지방의 권한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다. 신해혁명 후엔 손문 등이 총통부를 지켰다. 1912년 1월 1일 손문이 남경에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중국이 각 성을 대표하는 의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 외국의 간섭을 막기 위해서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홍장의 계승자이자 신군의 주된 훈련자였던 개혁 지향적 관료 원세개가 정부를 이끌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다. 그 해 2월 12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고 손문이 사임하면서 원세개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게 되었다. 손문은 사임하는 조건으로 임시정부 소재지를 남경으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하지만 원세개는 임시정부가 남경으로 결정되면 북방의 질서문란이 우려되고 열강도 수도를 북경에 둘 것을 원한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했다. 3월 10일 원세개는 북경에서 정식으로 중화민국 제2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였다.

게다가 원세개가 총통직을 차지하게 되자 총통권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임시약법이 제정되었다. 책임내각제적 성격이 강한 내각제를 채택하고 참의원의 권한을 강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이었다. 그래서 원세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내각을 통솔하고 참의원을 견제하며 지방의 군사, 재정, 민정을 장악해 분권적 성향이 강한 각 성도독의 권한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최초의 내각총리 당소의는 내각의 독자적 권한을 장악하고자 노력했다. 내각을 심의기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원세개는 자신에게 보고 없이 총리 권한으로 사무를 처리하는 당소의의 권력 행사를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총통과 총리는 직예도독 임명문제를 둘러싸고 충돌을 일으켰고 여기서 총리가 패배해 사직했다. 동맹회 출신의 각료들이 연대 사직한 후 우여곡절을 거쳐 새로 조직한 내각은, 국무회의를 총통부로 옮겨 총통 주재 하에 여는 등 책임내각제의 정신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에 동맹회의 후신으로 합법정당으로 조직되어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국민당은 총통권을 견제하기 위해 정당내각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928년 남경에서 성립한 국민당 정부는 1912년 이후의 정부 가운데 가장 장래성 있는 것으로 보였다. 관료들 가운데 다수는 외국에서 교육받은 애국자로서 근대적 국민국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근대적 생활의 쾌적함(영화, 자동차, 극장, 예술과 공예, 책과 잡지 등)과 국립중앙연구원의 10여 개 연구소, 중국은행, 국민정부의 위생부 등의 수많은 기구들은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노력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민중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주었을 국민당 정부의 잠재력은 곧바로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서 거의 파괴당해버렸다. 일본의 공업기술과 국수주의 정신은 중국에서 문명의 원칙을 짓밟고 있었고, 남경의 국민당 독재에 내재되었던 약점은 전쟁을 대비하고,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1940년대 국민당 시절엔 장개석이 이곳의 주인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 이후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로 나뉘었다. 국민당 좌파는 중공과 더불어 1927년 3월까지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온 혁명정부를 지배했다. 여기에는 특히나 손문의 부인이었던 송경령과 손문 추종자의 한 사람인 왕정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고문인 보로딘이 있었다. 무한은 새로운 수도로 선포되었다. 무한은 대규모 공업중심지였으므로 이는 중공의 전략에도 들어맞았다. 하지만 이 정부는 군사적인 힘에는 약점이 있었다. 좀 더 보수적인 국민당 지도자들의 후원을 받은 장개석은 강남지역이라는 부유한 전략적 중심을 목표로 삼았다. 그에게는 좌파보다 우위의 군사적 힘이 있었다. 1927년 상해-남경 지역이 손안에 들어오자 그는 군사력으로 중공을 탄압하고 자신의 위치를 강화시켰다. 상해에서는 1927년 4월 이미 지방의 통제권을 장악한 중공이 이끄는 노동조합이 외국의 군대, 군함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료로서 장개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장개석의 군대에 의해 무참하게 공격, 학살당했다. 이 때 장개석은 상해 지하세계를 장악한 청방의 도움을 받았다. 장개석은 남경에 수도를 정했으며, 뒤이어 곧바로 무한의 자방군벌이 좌파 정부를 무너뜨리고 장악했다. 새로운 남경정부는 중공 당원을 모두 공직에서 추방했으며, 그들을 탄압하기 위한 전국적인 테러를 감행했다.

혁명이후 총통부 건물은 남경시 군사관리위원회, 남경시 유물관리위원회, 강소성 인민위원회, 강소성 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강소성 인민정부, 강소성 정치협상회의 등 다양하게 활용되다가 1998년부터 난징 근대사 유적 박물관으로 바뀌어서 중국의 가장 큰 근대사박물관으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총통부의 역사적 의의

남경 총통부는 중국의 첫 번째 민주공화국의 탄생지이자, 수천 년의 군주전제 역사의 종결지이다. 수많은 정치 인사들과 사건들이 거쳐 간 만큼 오늘의 중국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근대사의 정치적, 역사적 변천을 잘 담아내고 있어 남경 여행 시 반드시 들러야할 근대 중국역사의 중요한 역사유적이 되었다.

  1. 바이두백과, 总统府[네이버 지식백과] 난징총통부 [Nanjing Zongtongfu, 南京總統府(남경총통부)] (두산백과).
  2. 존 킹 페어뱅크 외, 김형종 외 번역,『신중국사』, 서울:까치,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