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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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의 청하(淸河) 최씨는 효문제(孝文帝)의 성족상정 때 북족 최고 귀족가문인 8성(姓)에 대응한 한족 4성의 하나일 만큼 명망있는 가문이었다. 특히 최호의 아버지인 최굉(崔宏)은 북위 초 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총지휘자로서 항상 태조(太祖) 도무제(道武帝)의 정책고문역으로 활동했다. 최굉은 태종(太宗) 초 국정을 총람한 8명의 대신 중 유일한 한족 출신으로 참가할 정도로 한인사족(漢人士族)의 영수 자리를 차지하였다.
최호 역시 최고 명문출신이라는 가문적 배경과 그 자신이 갖고 있는 독특한 능력, 즉 유학·사학·서도·천문·술수(術數) 등의 능력을 배경으로 일찍이 태조 때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직랑(直郞)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조 태무제 때인 431년에는 한인사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사도(司徒)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관료생활의 극점을 이루었다.
그뒤 20년 동안 북위 조정의 중요한 일은 거의 그가 담당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호의 역할은 컸다. 그가 오랜 기간 동안 호족이 세운 북위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가문과 그의 능력 이외에도 황제의 두터운 신임 때문이었다. 그가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능력 중에서도 천문과 술수가 크게 작용하였다. 북위 건국 당시부터 태무제 때까지는 해마다 외정(外征)이 끊이지 않아 최호의 장기인 천문과 술수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호는 그간 중단되었던 국사편찬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태무제 때인 429년에 사직(史職)에 임명되어 국사편찬의 총책임을 맡았다. 최호는 한인 귀족세력을 믿고 화이사상을 근거로 국사에 북위 조상들의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기록하고, 이를 비석에 새겨 세움으로써 선비족의 분노를 샀다. 이에 최호를 비롯한 최씨일족은 물론 그와 인척관계에 있었던 범양(范陽)의 노씨, 태원(太原)의 곽씨, 그리고 하동(河東)의 유씨 등 화북의 명문귀족 128명은 태무제에 의해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