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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961년 여름의 대홍수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논밭이 침수되었다. 이로 인해 1962~1963년 동안 쌀농사 흉작으로 식량은 바닥이 났다. 서울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미국 정부는 1961년 의회에서 통과시킨 1962년도 책정 2000만 달러 상당의 대한국 식량 원조를 해가 바뀌도록 집행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의 심각한 식량위기사태를 고려할 때 지나친 처사였다. 여기에는 반드시 미국 정부의 어떤 배경이 작용하고 있을 것으로 꿰뚫어본 리영희가 그 배경을 확인하기 위해 주한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핸더슨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평소 리영희를 매우 신뢰한 핸더슨은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박정희가 케네디와 약속한 민정이양을 지키지 않아서 미국 정부가 식량 원조 집행을 보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식량 원조를 통해 저개발 국가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리영희는 이를 지체 없이 기사로 썼다.

리영희는 언론인으로서 의무와 개인적 의리 사이에서 무척 갈등했지만, 기사를 내 보냈고 박정희로 하여금 형식적이나마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를 치르게 만들고, 그동안 창고에서 있던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들어와 국민에게 나눠주는 데 기여했다.

기사가 나가고, 핸더슨은 48시간 내에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미국 정부의 소환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하버드대학 출신의 유망한 직업 외교관은 이 사건으로 결국 면직되었다.

25년 뒤 핸더슨의 사망소식을 듣고 리영희는 신문에 <25년 전의 마음의 빚>이라는 칼럼을 썼으며, 인간관계를 소홀히 했던 지난 날 자신의 과오를 뉘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