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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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ixian70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26일 (화) 20:1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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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풍태후는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 탁발준(拓跋濬)의 황후이며, 시호(諡號)는 문명태후(文明太后)이다. 문성제가 사망한 후 황태자 탁발홍(拓跋弘)이 열두 살에 황위를 계승했을 때 섭정을 시작하며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또한 탁발홍이 물러나고 효문제(孝文帝)가 왕위에 올랐을 때 권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한족의 제도를 수용해 적극적으로 북위의 기존 풍습을 개혁했다.


생애

북연 황족 출신에서 북위 노비 신분으로 전락하다.

‘태후’로 불리기 전의 풍 씨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풍 씨의 아버지인 풍랑(馮朗)은 북연의 소성제(昭成帝) 풍홍(馮弘)의 아들로 본래 북연의 황족 출신이었지만 북연에 망조가 짙게 깔리자 북위에 귀순했다. 풍랑은 북위에서 관직을 맡으며 아들 풍희(馮熙)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딸이 바로 북연이 멸망한 후 채 6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442년 태어난 풍 씨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풍랑이 모반에 연루되어 죽게 되었다. 당시 북위에서 죄인의 가족 중 남자의 경우 몰살당했고, 여자의 경우에는 궁궐 노비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따라 풍 씨 역시 북위의 노비로 전략해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모의 보살핌 아래 문성제의 여인이 되다.

풍 씨는 당시 북위 황제였던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의 총비 좌소의(左昭儀)의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녀는 과거 북연의 공주이자 풍 씨의 고모였다. 풍 씨는 운 좋게 고모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가 궁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위 궁 안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452년 환관 종애(宗愛)가 태무제를 시해하고, 그 다음으로 즉위한 탁발여(拓跋余)까지 죽이고 손자 탁발준을 황제로 옹립한 것이다. 짧은 기간에 황제가 여러 번 바뀐 것을 본 좌소의는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풍 씨를 탁발준에게 바쳤다. 풍 씨는 탁발준 문성제의 총애를 받아 그녀가 11살일 때 귀인으로 책봉되었다가 그녀가 14살 때 정식 황후로 책봉되었다.

모계 권력을 억제하려던 북위의 관습

풍 씨가 슬하에 친아들을 두지 않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서는 북위만의 독특한 규율을 살펴봐야 한다. 북위의 초대 황제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는 선비족, 즉 유목민족이다. 유목민족은 농경민족보다 모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탁발규가 황제에 오르기 전 일어났던 대부분의 전쟁 역시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탁발 씨 일족을 비롯해 처가, 외가, 친가 등 부족 간 싸움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북위에는 특이한 관습이 만들어졌는데, 바로 후비가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면 태자의 생모는 모두 사약을 받는 것이었다. 이 관습은 황후로 책봉된 풍 씨 역시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태자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 또한 사약을 마셔야 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탁발준이 총애했던, 그리고 풍 씨와 황후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이비(李妃)에게 사약이 내려지게 했다. 탁발준에게 태자를 세우도록 부추겨서 이비의 장자 탁발홍이 태자로 세워지며 북위의 규율에 따라 이비가 사약을 받은 것이었다. 이는 풍 씨가 황후 자리가 오른 지 채 한 달이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문성제의 이른 사망, 그리고 정치력 발휘의 시작

465년, 문성제가 26세에 병으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북위에서는 오랜 관습에 따라 황제가 쓰던 물품을 태웠는데, 그가 죽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물품을 태우는 과정에서 풍 씨가 통곡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가려던 것을 주위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 문성제의 뒤를 이어 이비의 장자이자 태자였던 탁발홍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바로 헌문제(獻文帝)이다. 또한 풍 씨 역시 풍태후로 받들어졌다. 모계 권력을 견제하던 북위의 관습에 따르면 풍태후 역시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탁발홍이 즉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고, 권력은 어린 황제가 아니라 태원왕(太原王) 기마대장 을혼(乙渾)의 손에 있었다. 을혼은 감금되어 있던 상서(尙書) 양보년과 평양공 가애인을 죽이라 명했으며, 탁발준의 장례를 위해 궁에 왔던 평원왕 욱려도 죽여 버렸다. 을혼의 폭정은 문성제가 죽은 다음해 2월, 풍태후가 왕실 사람들과 대신, 장군들을 이끌고 을혼 무리를 진압하기 전까지 이뤄졌다. 풍태후는 을혼의 반란군을 진입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국정을 살필 것임을 선포했다. 헌문제가 14살이 될 때까지 총 2년 여간 풍태후는 공식적으로 섭정했다. 467년 8월 헌문제의 부인 이씨가 아들 탁발굉을 낳은 후, 풍태후는 조정 권력을 헌문제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이것이 풍태후가 정치에서 완전히 손 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풍태후가 뽑아둔 조정 내의 관료들과 풍태후가 정치적으로 관여했고, 이에 대해 헌문제는 불쾌해했다. 헌문제는 뇌물죄를 빌미로 당시 풍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이혁(李弈)과 그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 하지만 풍태후는 직접 헌문제에게 보복하는 것 대신, 정치적으로 그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썼다. 정사에서 계속 자신의 뜻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헌문제는 결국 즉위한 지 5년 만에 자신의 숙부인 탁발자를 다음 황제로 추천하며 자신은 보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풍태후 입장에서 나이 많은 탁발자를 맡게 되면 자신이 섭정할 명분이 사라졌다. 따라서 그녀는 탁발홍의 아들인 탁발굉을 추천했는데, 그가 바로 효문제이다. 효문제는 471년 8월, 다섯 살을 채우기 전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효문제의 즉위, 헌문제의 피살, 그리고 개혁

효문제 탁발굉은 겨우 다섯 살에 즉위했다. 풍태후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직접 기르며 가르쳤다. 당시 풍태후 입장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헌문제, 즉 황제 자리에서는 물러났으나 태상황이 된 탁발홍이었다. 471년에 자신의 아들 탁발굉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탁발홍은 계속 조정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칙령을 내려서 정치, 경제 등의 국가의 큰일은 자신이 직접 처리했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변방의 외적을 토벌했다. 475년 10월에는 평성 북쪽 교회에서 열병식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떨쳐보려고 했다. 결국 476년 6월, 풍태후는 헌문제를 독살시켰다. 이는 『위서』 권105, 천상지3(2413쪽)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高祖承明元年 5월 康子) 헌문제가 깨닫지 못하다가 6월에 이르러 폭붕(暴崩 -돌연사)하였다. 실로 그것은 酖毒(짐독)의 網(화)가 아닌가”

헌문제는 그렇게 스물 셋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헌문제의 사망 후, 더 이상 풍태후와 정치적으로 부딪치는 인물은 없었다. 또한 효문제는 어렸을 때부터 풍태후의 손에 길러져 그녀에게 큰 효심을 보이고 있었다. 비록 황제는 효문제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풍태후였다. 풍태후는 약 14년 간의 집정 기간 동안 북위에 남아있던 악습을 철폐하고, 한족의 생활방식과 예절방식, 제도 등을 수용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을 펼쳐갔다. 그녀의 개혁은 북위 한족화 과정에 기초가 되었다.

49세의 일기로 눈을 감다.

풍태후는 491년 9월, 병으로 인해 눈을 감았다. 당시 효문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5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분출하였다. 10월에 효문제가 풍태후를 방산의 영고릉에 안장하였는데 능묘와 장례의 규모가 국왕의 예를 갖춘 것이었다. 또한 풍태후에 대한 효문제의 추모의 정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조서가 반포되기도 했다.

태화개혁

풍태후에 대한 평가

풍태후는 ‘문명태후’라는 시호를 받은 것처럼 뛰어난 여성 정치가였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그녀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풍태후의 태화개혁 덕분에 북위가 안정되고 번성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다. 풍태후가 권력을 장악한 후, 이를 남용하지 않고 효문제를 교육하고 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북위의 번영에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관점이다. 반면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도 있다. 권력을 탐하면서 헌문제를 사실상 폐위시키고, 끝내 독살시킨 점은 풍태후 정치 인생의 가장 큰 오점이라고 평가받는다. 또한 비록 태화개혁을 통해 나라의 번영에 기여를 했지만, 그녀의 장기적인 집권은 북위 후기에 효문황후 유씨와 같은 황후들이 자신들이 집정해야 하는 이유, 즉 선례로 남게 되었다. 후대에 풍태후가 ‘문명태후’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분명 그녀가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역사에 인정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풍태후가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봤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단순히 그녀의 업적만으로 덮어서는 안 된다는 평가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역사서 속 풍태후

청나라의 초기 학자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에 따르면, 역사서 속 풍태후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北魏) 문명풍태후(文明馮太后)는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았으며, 총애하던 자로[內寵] 이혁(李奕)이란 이가 있었는데, 헌문제(獻文帝)가 다른 일로 그를 죽이자 풍태후는 결국 헌문제를 죽였다.” (『魏書』 卷13 「文成文明皇后馮氏傳」, 328면)

“승명(承明) 원년(476)에 나이 스물셋으로 (헌문)제가 영안전(永安殿)에서 죽었다.” (『魏書』 卷6 「顯祖紀」, 132면)

“문명태후가 (헌문)제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어 (헌문)제가 죽었다.” (『北史』 卷2 「魏顯祖紀」, 77면)

“태후는 성품이 엄격하고 분명해서 좌우에 허물이 있으면 곧잘 매질을 가했는데, 그래도 곧 이어 또 처음과 같이 대우했고, 혹은 다시 부귀함을 더해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녀가 준) 이로움에 마음을 두고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魏書』 卷13 「文成文明皇后馮氏傳」, 329면)

“태후는 또한 밖으로 인망이 있는 원비(元丕), 유명근(游明根) 등을 예로 대우하여, 왕예 등을 장려하고 칭찬할 때마다 번번이 (원)비 등을 끌어 참석시켜서 사사로움이 없음을 보였다.” (『魏書』 卷13 「文成文明皇后馮氏傳」, 3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