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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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코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11월 29일 (일) 17: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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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韓愈)

출생 768년
하남성(河南省)
사망 824년
생존시기 당대
주요 작품 《进学解》《杂说》《师说》
관련 활동 문학, 정치


한유(768~824년)는 당대 중기를 대표한 문인, 사상가, 사대부이다. 당송팔대가 (唐宋八大家)의 한 명이다.


한유(韓愈)

한유의 생애

어릴 때 부모를 잃어, 14살 때 형을 잃었으니 형수 정씨에 의해 길러졌다. 789년부터 과거에 응시했으나 아는 문벌도 뒷배경도 없었던 그는 이후 세 번이나 낙제한 뒤, 4번째인 792년에 진사관에 합격하였다. 이후 감찰어사 (監察御史)가 되었으나 높은 벼슬아치를 탄핵하여 지방 현령으로 벼슬이 좌천되었다. 805년 大赦으로 인해 다시 중앙으로 복귀된 후, 中書舎人 등 여러 가지 관직을 겪었으나, 819년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헌종이 부처의 뼈를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여 다시 광둥성으로 좌천되었다. 헌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다시 중안으로 소환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한유가 살았던 시대

한유가 살았던 시기는 안사의 난 이후의 제국의 힘을 잃어가는 시기다. 위진남북조시대서부터의 풍조에 따라 귀족이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귀족출신자가 높은 관직에 임명되고, 과거급제자는 냉대받는 경향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식인 사이에서 남의 스승이 되거나 남의 제자가 되는 것을 서로 비웃거나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당대 과거제도에 있어서는 유교가 필수과목이었고 동시에 불교가 발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교는 쇠퇴한 상태였으며 한유는 유학을 부흥시키고 불교를 공격하는 주장을 견지했다. 산문방면에서는 그 당시 변려문이 일반적인 문장형태였으나 한유, 유종원 등 이전의 고문 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여 고문운동이 일어났다.

한유의 작품

한유의 작품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700 정도이며 그 중 400 정도는 산문이다.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형식의 문장으로 쓰여져 있으며 그 작품들은 문학적 가치도 매우 높다. 이하는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잡문으로서는 《进学解》《杂说》《获麟解》《师说》들이 있으며, 서문은 《送李愿归盘谷序》《送孟东野序》, 전기문은 《毛颖传》《张中丞传后叙》《柳子厚墓志铭》, 시는 《答张十一功曹》《左迁至蓝关示侄孙湘》《次潼关先寄张十二阁老》《题驿梁》, 여사서는 《顺宗实录》들이 있다.

참고자로

<한유산문역주1>, 한유 지음, 이종한 옮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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