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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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Nam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5월 15일 (일) 05:04 판 (선정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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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BC179-BC157

통치

통치기간동안 황노사상에 입각해 선정을 펼쳤다. 왕실의 재정을 줄여 황제 자신부터 검약한 생활을 실천했다.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농사를 짓는 자전(藉田)을 행하였다. 또한 토지세를 1/15에서 1/30으로 줄이고, 만년의 12년간은 완전히 토지세를 면세했다. 흉년에는 국가의 곡물을 방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신체를 손상시키는 잔인한 육형을 폐지하고 대신 노역형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비방죄와 유언비어 날포죄를 제외하고는 언로를 개방하였다.

선정의 이면

농업생산량이 회복되면서 점차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호족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가의는 중본억상정책을 실행할 것을 황제에게 상주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후왕이 황제를 그냥 대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으며, 濟北王은 자신의 봉지가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淮南王은 스스로 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작위를 수여하는 등 황제의 행위를 흉내 내었다. 吳王은 자신의 아들이 태자(경제)에게 죽은 것을 원망해 건강을 핑계로 入朝조차 하지 않았다. [황노사상]]의 미명아래 황제의 권력이 추락하고 제국 내부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가의는 봉지삭감을 통한 황제 권력을 강화할 것을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