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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년 풍태후가 죽고 친정을 개시한 탁발굉 즉 효문제(재위 471~499)가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호족국가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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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년 [[풍태후]]가 죽고 친정을 개시한 탁발굉 즉 효문제(재위 471~499)가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호족국가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효문제는 중국적 교양을 완벽하게 갖춘 문화인이었다. 경서와 사서는 물론 노장학에서 불교 교의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문장력이 탁월하여 삼장제가 시행된 486년 이후의 조칙은 모두 그의 자필로 작성되었다. 이러한 교양인이 남조에서 유지되고 있는 선진적인 중국문명의 국가체제를 배우려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국가개조에 대한 열의는 단순히 개인적 관심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성을 중심으로 하는 기내의 선비귀족의 부패와 그런 벽촌지역에서 소수의 선비족으로 광대한 화북을 통치해야 하는 곤란을 생각할 때, 일대 타개책을 내세울 필요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이리하여 그는 493년에 평성에서 낙양으로의 천도를 강행한다.
 
효문제는 중국적 교양을 완벽하게 갖춘 문화인이었다. 경서와 사서는 물론 노장학에서 불교 교의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문장력이 탁월하여 삼장제가 시행된 486년 이후의 조칙은 모두 그의 자필로 작성되었다. 이러한 교양인이 남조에서 유지되고 있는 선진적인 중국문명의 국가체제를 배우려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국가개조에 대한 열의는 단순히 개인적 관심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성을 중심으로 하는 기내의 선비귀족의 부패와 그런 벽촌지역에서 소수의 선비족으로 광대한 화북을 통치해야 하는 곤란을 생각할 때, 일대 타개책을 내세울 필요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이리하여 그는 493년에 평성에서 낙양으로의 천도를 강행한다.
 
[[분류:인물]]
 
[[분류:인물]]

2019년 5월 23일 (목) 14:00 판

490년 풍태후가 죽고 친정을 개시한 탁발굉 즉 효문제(재위 471~499)가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호족국가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효문제는 중국적 교양을 완벽하게 갖춘 문화인이었다. 경서와 사서는 물론 노장학에서 불교 교의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문장력이 탁월하여 삼장제가 시행된 486년 이후의 조칙은 모두 그의 자필로 작성되었다. 이러한 교양인이 남조에서 유지되고 있는 선진적인 중국문명의 국가체제를 배우려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국가개조에 대한 열의는 단순히 개인적 관심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성을 중심으로 하는 기내의 선비귀족의 부패와 그런 벽촌지역에서 소수의 선비족으로 광대한 화북을 통치해야 하는 곤란을 생각할 때, 일대 타개책을 내세울 필요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이리하여 그는 493년에 평성에서 낙양으로의 천도를 강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