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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2일 (금) 03:46 판

호적(후스)(胡适)

출생 1891.12.17
사망 1962.2.24
관련 활동 사상가, 교육가

개요

호적(胡适, 후스, 1891.12.17-1962.2.24), 중국 근대 유명 학자이자 시인으로, 백화문(白话文)을 제창하고, 신문화운동(新文化运动)을 주도하면서 세상에 유명해졌다.

생애

  • 1891년 강소성 출생
  • 1910년 미국유학
  • 1915년 컬럼비아대학 철학과 입학
  • 1917년 북경대학 교수, 『신청년』 참여
  • 1920년 『신청년』과 결별 이후 자유주의적 문학, 학술, 교육 활동, 국고정리
  •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장개석이 후스에게 미국에 가서 지지 얻을 것을 요구
  • 1938년 중화민국 주미대사
  • 1946년 북경대학 총장
  • 1949년 도미
  • 1952년 대만 중앙연구원 원장
  • 1962년 타이베이에서 사망

후스와 신문화운동

5.4 운동이 발발하기 몇 년 전인 1915년부터 진독수가 창간한 잡지 『신청년』을 중심으로 중국 지식인들은 사상문화운동인 이른바 신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신청년』을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지식인들은 유가사상과 봉건예교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서구 근대정신인 자유, 평등, 독립의 사상을 고취하고자 하였으며 "과학"과 "민주"를 기치로 내걸었다. 사상문화운동의 영향 속에서 정치운동으로서의 5.4운동은 일어날 수 있었고, 또 5.4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면서 신문화운동은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러한 신문화운동에 후스가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17년 잡지 『신청년』에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를 발표하여 문학혁명을 제기하면서 부터이다.

문학혁명

'문학혁명'이라는 용어는 후스가 미국 유학 시기에 코넬대학에서 쓴 시에 처음 등장한다. 이때 사용한 '문학혁명'이라는 용어는 후스가 그의 친구들과 중국의 언어에 대해 토론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학술적인 성격을 띠었다. 후스는 이때 백화가 생명력 있는 문학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논쟁을 벌이고 증명하기에 힘썼다. 후스 이전에도 백화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후스는 과거 천여 년 동안 중국 문학의 주류는 결코 고전문체의 시문이 아니라 백화문학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문언은 이미 '반은 죽은' 언어였다. 그에 비해 백화는 문학 진화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살아 있는 언어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후스는 살아 있는 언어를 확립하는 것이 신사상 운동의 선결 조건이라고 판단하고 문학혁명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백화문으로써 문언문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후스는 처음 신문화운동에 뛰어들어 사상문화운동의 한 부문으로서 문학혁명을 제기하였지만 그 의도는 도구(형식)로서의 언어문자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문학혁명의 전제조건으로서 표준어(국어)의 확립이 더욱 시급함을 제기하였다. 후스가 제기학 문학혁명은 일차적으로 문체개혁의 의미를 띠고 있었고, 결론적으로 문체개혁은 중국의 표준어(국어)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스는 문학혁명을 전개함에 있어 언어문자를 더 많은 계층이 향유할 수 있도록 문체개혁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러한 스의 초기 신문화운동은 5.4운동을 거치면서 백화문의 전면적 사용이라는 성공을 거두면서 중국문학이 근대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는 언어 도구의 확립을 가져왔다. 후스의 문체개혁운동은 문학형식 면에서 3천 년의 전통문화의 구조를 흔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사상, 심리 ,정신 면에서 계몽의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문제와 주의 논쟁

신문화운동은 5.4운동을 계기로 정치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후스는 점점 급진화하고 "직접적 운동"에 뛰어드는 지식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신청년』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문화운동 진영의 분화는 5.4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19년 7월 후스의 「문제를 보다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보다 적게 말하라(多硏究問題少談主義)」라는 글이 발표되면서 표면화되었다. 후스는 5.4운동을 전후해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지는 급진주의에 대해 우려를 가졌다. 후스의 실용주의 관점과 이대조를 대표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충돌로 문제와 주의 논쟁은 격화되었다. 이 논쟁에 있어서 "주의"를 경계하는 후스의 시각은 실용주의 입장에 입각하여 마르크스 주의를 비판하고 신문화운동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후스가 말하는 신문화운동의 전개 방법은 방법으로서 비판적 태도에 도움이 될 만한 학술이론을 통해 중국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연구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국고정리

후스는 문제와 주의 논쟁 이후 신문화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정리는 국고의 정리를 시행하였다. 그는 국고정리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고대의 학술사상은 지금까지 조리가 없고 두서가 없고 체계가 없으므로 제 1단계는 조리있고 체계적인 정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후스의 국고 정리는 전통문화에 대한 편견 없는 비판의 대원칙을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중국문명을 단순히 보존, 모방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정리를 통해 재건하려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험주의적 방법을 실제로 적용하여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면적 서구화

후스는 1929년 「오늘날 중국의 문화충돌」이라는 글을 싣고 서구 근대문화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밝히면서, "전면적인 서구화"를 주장하였다. 후스의 전반적인 서구화는 문명의 동일성에 착안하여 진화론적으로 앞선 서구문명을 보편문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으로 중국문명을 대체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후스가 생각하는 서구 근대문명의 정점은 과학이었다. 후스는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서구의 과학을 추구하는 것만이 동방문명의 낙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후스의 신문화운동의 목적은 중국 문명의 재건에 있었지만 그 방향은 보편문명으로서의 서구 근대문명의 최대 특징인 과학의 방법을 실제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주요 저서

  •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1917)
  • 중국 철학사 대강(1919)
  • 구어 시집 상시집(嘗試集)(1921)
  • 백화(白話)문학사(1928)
  • 후스 문존(文存)(1930)
  • 사십자술(四十自述)(1933)

참고 문헌

  • 홍석표, 「胡適의 신문화운동의 방향-"방법"으로서의 근대 지향」,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제 18집, 2000, pp.13-35
  • 홍석표, 『중국현대문학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5,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