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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정치제도는 수대의 기초 위에 수정을 가하여 만들어졌다. 3성 6부는 당 대 행정 체계로서 중앙 최고 기구로 중서·문하·상서의 삼성을 설치해 황제가 전국의 업무를 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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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정치제도는 수대의 기초 위에 수정을 가하여 만들어졌다. [[3성]] [[6부]]는 당 대 행정 체계로서 중앙 최고 기구로 중서·문하·상서의 삼성을 설치해 황제가 전국의 업무를 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3성==
 
3성은 각각 업무를 분담했는데 중서성은 주로 황제 조칙의 기안을 담당하였다. 장관은 중서령이고 그 밑에는 중서시랑, 중서사인 등의 관원이 있었다. 문하성은 중서성이 기안한 정령(政令)에 대한 심의를 담당하였는데, 기안된 조칙에 타당치 못한 점이 발견되면 봉박(封駁)을 행하여 중서성으로 돌려보냈다. 장관은 시랑이고 그 밑에는 문하시랑, 급사중 등이 있었다. 상서성은 정령의 시행을 관장하였는데 이는 전국 정무 관리기구의 핵심이었다.
 
 
 
당 대 국가 정령을 반포하는 과정은 우선 중서성의 관원이 하달한 조서의 내용을 분담하여 기안하고, 시랑·중서령의 심사를 거친 후에 문하성으로 보내어 급사중·문하시랑의 심의를 받게 되는데, 만일 반대의견이 있으면 봉박하고 되돌려 보내 다시 기안할 수 있게 했다. 만약 문하성에서 의논을 통해 조서의 내용이 통과되면 시랑·시중이 함께 서명하고 다시 상서성으로 보내 시행하도록 했다. 당 대에 3성을 설치한 목적은 3성간의 상호 직무분담과 상호 견제를 통하여, 한 성의 과도한 권력 집중을 방지하고 정령의 결제와 시행 과정에서의 과실을 적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무 과정에서 중서·문하가 조직의 기안과 심의를 분담함으로써 생기는 결함도 있었다. 만약 두 성의 의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공문의 왕래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당 초부터는 두 성의 장관이 합동 처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상서성은 최고 행정 집행기구였다. 중앙부터 지방까지 모든 업무가 이곳에서 총괄했으므로 직책이 과중하고 사무가 번잡하고 기관이 방대했으며 여러 속관도 두었다.
 
  
 
==6부==
 
==6부==

2016년 6월 21일 (화) 14:54 판

당대의 정치제도는 수대의 기초 위에 수정을 가하여 만들어졌다. 3성 6부는 당 대 행정 체계로서 중앙 최고 기구로 중서·문하·상서의 삼성을 설치해 황제가 전국의 업무를 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6부

상서성의 밑에는 다양한 직무에 따라 이·호·예·병·형·공의 6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각 부에는 상서가 있ᄋᅠᆻ고 시랑은 차관으로서 각 부의 정무를 분담하였다. 또한 부의 밑에는 각각 사사(四司)를 설치하여 총 24사를 두었다. 1사에는 각각 낭중(郎中)·원외랑(員外郞)을 두어 구체적인 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성내 사무관리의 편리를 위하여 상서성에는 좌·우 승(承)을 두었는데, 좌승은 이·호·예 3부를 담당하고 우승은 병·형·공 3부를 분담하여 상서·시랑과 함께 부속 관리를 감독하였다.

3성6부제의 의의

상서성, 6부, 24사의 설치는 국가 행정체제의 확립을 표시한다. 당 대의 상서성·육부는 중앙의 여타 기구에 대해서 정책상으로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상서성은 여러 사감의 업무에 대해서도 일정한 통속 관계를 갖고 있었다.

당 대 재상과 3성 6부 제도의 확립은 봉건사회의 정치제도가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타나내는 것이다. 이는 그 이후의 정치제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3성 제도는 송 대까지, 6부 제도는 명청 시대까지 그 기조를 유지했음을 보면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