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陣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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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陣圖
杜甫

功蓋三分國, 공개삼분국,gōng gài sān fēn guó, 세운 공은 셋으로 나뉜 천하를 뒤덮었고,

名成八陣圖。명성팔진도.míng chéng bā zhèn tú 그 명성 팔진도로 이루었네.

江流石不轉, 강류석부전,Jiāng liú shí bú zhuǎn, 강물은 흘러도 그 돌들은 굴러 없어지지 않으니,

遺恨失呑吳。유한실탄오.yí hèn shī tūn wú 남은 한은 오를 치라는 말씀 따른 실책이어라.


원문 낭송

<주석>

  • 八陣圖: 삼국지의 제갈량이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진법이다. 기병이 잘 육성되었던 위(魏)의 전력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전략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시에서 가리키는 팔진도는 진법 그 자체가 아니라 제갈량이 어복현(魚復縣, 현재의 충칭시)에 돌로 만든 진법의 도형을 뜻한다. 강가에 만들었다고 하며, 훗날 강가의 골이 불어나면서 주변의 나무들은 물에 떠내려갔으나 돌만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한다. 八陣圖 유적 관련 기사 참고
  • : 가리우다, 뒤덮다
  • 呑吳: 오 나라를 병탄하고자 함.

<해설>

본 시는 오언절구의 시로 압운은 도(圖)와 오(吳)로 맞춰져 있다. 제1구에서는 먼저 가장 세력이 약하였던 촉한을 키워 천하를 삼등분하게 하였던 제갈량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으며, 이어서 제2구에서는 전략가 제갈량의 대표적인 진법 팔진도를 언급함으로써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이렇듯 제1구와 2구는 제갈량이라는 역사적 위인에 대한 평가로 유수대를 이루고 있다. 제3구에서는 강물과도 같이 빠르게 흐르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제갈량의 업적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언급하면서 1, 2 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제갈량의 인물 묘사에 화룡점정을 찍지만, 마지막 4구에서는 오히려 제갈량이라는 위인의 통한의 실책을 언급함으로써 시의 여운을 길게 남긴다. 1, 2구와 3, 4구가 짝을 지어 유수대를 이루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시가 1구에서 4구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상>

이 시는 당대(唐代) 766년에 두보가 기주(夔州:쓰촨성 동쪽의 도시)에 처음 들어설 때 썼던 시로 그의 나이 55세, 세상을 뜨기 3년 전에 창작한 시이다. 본격적인 감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 시를 창작하기까지 두보의 인생과정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삼국지 후기의 인물인 두예의 먼 후손이자 시인 두심언의 손자로 태어난 두보는 어려서부터 시의 재능이 출중하였으나 억울한 이유로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여 방랑하던 인물이었다. 44세에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강직하고 아첨하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인지 1년도 못 가 화주[華州]로 좌천되었으며, 이때 대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어 죽자 상부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이에 분노하여 사직 후 귀향길에 올랐다고 한다. 따라서 본 시의 창작 배경이 두보가 말년에 가까워 지면서 현실에 좌절하고 고향으로 향하던 도중이었음을 기억하고 감상할 필요가 있다

본 시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당대(특히 초당, 성당시기)의 오언절구 시가 일반적으로 1, 2구에서 자연과 공간적 배경에 대한 묘사로 시를 전개하는 데 반하여 바로 시의 주제의식을 1, 2구부터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개방식은 안사의 난 전후로 두보의 시적 성향이 현실적이고 정치적으로 변화한 것을 원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 좌절의 끝을 맛본 말년의 두보가 자신의 내면을 어떠한 격식이나 미사여구 없이 있는 그대로 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보는 1, 2구를 통해 삼국지의 위인 제갈량의 명성을 칭송하면서 그의 역사적 업적이 자연의 풍파에도 없어지지 않는 불멸성을 띄고 있음을 언급한다. 3구의 강물은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단어 그대로 강물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시간 혹은 역사적 흐름을 뜻하기도 한다. 공자 역시 세월을 밤낮없이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 적이 있으며(逝者如斯夫, 不舍晝夜), 후세에 유교적인 시성(詩聖)의 이미지가 강한 두보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표현한 구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의 풍파가 물질을 마모시키듯, 세월의 흐름도 인간에게 망각을 가져다준다. 그런데도 자연의 풍파 속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팔진도의 흔적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후세에 의해 기억되는 제갈량의 명성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두보는 현재 느끼고 있는 좌절과 소외감은 언젠가 세월의 흐름에 잊히겠지만, 자신의 창작물이 가지고 있는 시대를 넘나드는 소통성과 불멸성을 엿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두보는 마지막 4구에서 제갈량의 실책과 이에 대해 남은 한을 언급하는데, 제갈량과 같은 역사적 위인 또한 일생에 실책과 유한이 있으며 역사는 그의 업적과 동시에 모든 것을 기억하니, 말년의 두보 역시 곧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억될 개인의 업적과 과오를 팔진도의 흔적과 제갈량을 통해 생각해보고 이를 시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