两个研究工具及两个结论
3. 두 가지 연구 방법과 두 개의 결론.
넓은 영토와 수 억의 인구, 여러 복잡한 민속풍습을 가진 지역이 장기간 통일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통치자는 반드시 사회 각계 각층의 이익분배와 기본 제도의 건립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두 가지 관찰과 분석의 도구를 도출해 냈다.
첫번째는 4대 이익집단의 정치게임법(博弈法)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역사상 그리고 현재 중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중앙정부, 지방정부,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이 네 개의 집단간의 다툼과 타협의 결과물이다.
중국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중앙정부, 지방정부, 유산계급, 무산계급 . 이 4가지 이익집단 간의 다툼과 타혐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번째는 4대 기본 제도의 분석법이다. 중국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는 것보다 중국의 독특한 부분에 신경을 쓰는 것이 더 낫다. 우리는 현재 상위 30위권 경제력의 국가 들중 유일하게 2천년이나 지속된 중앙집권제도의 역사를 가진 국가이다. 중앙집권제와 대일통이라는 국가 형태는 절대 하루만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이 제도들은 피비린내나는 역사와 길고긴 숙고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 졌다. 전제정치를 하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중앙집권통치를 중앙과 지방의 권력분배, 백성들의 생각을 제어, 사회엘리트들의 통치, 이와 어울리는 거시 경제제도 형식이라는 4가지 모델을 이용하여 유지하고 싶어한다. 중국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제도들의 탄생은 본질적으로, 모두(공업문명 이전까지는) 다음 4가지 기본 제도를 둘러싸고 전개가 된다.
= 군현제도 : 제국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선 반드시 중앙이 인사 임명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제국의 힘이 닿지 않는 지역에는 할거 세력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 숭유제도(尊儒) : '백가쟁명'의 학술 전통을 목졸라 죽이고, 모든 백성들의 의식 형태를 하나로 통일하였다.
= 과거제도 : 공평한 시험제도를 통해 사회의 엘리트들을 체제안으로 끌어들여 사용하였다.
= 국유전영(国有专营국가가 소유하고 독점하여 운영하는)제도 : 경제적으로 중요한 자원을 국유화 시키고 국가가 독점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국가가 민생을 통제, 계획할 수 있었다.
군현제, 숭유제, 과거제, 국유전영제도는 중앙집권 정치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이 4가지 제도들은 기둥과 같아서 중앙집권 정치체제라는 지붕을 같이 떠받치고 있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각 이익집단들의 행위와 사고를 하나로 통일시킴으로서 상명하달식의 제도를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수천년동안 다듬어지고 탐색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제도들은 나날히 정교해지교 완전해졌으며 명청시대에 그 절정을 찍었다. 량치챠오는 "중국이 전제주의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국가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전제주의 체제는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발전하였다"라고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견대로라면, 중국은 정말로 통일 제도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중국은 세계화의 추세 아래, 쉽지 않은 현대화를 하기 시작하였고,위에 서술한 4가지 큰 제도들 또한 많은 부분들이 크게 변화하였다. 하지만 통일제국을 유지하고, 권위적인 통치를 실시하는 부분에있어서는 실직적인 변화가 없었다. 때문에, 제도의 수단과 만들어진 목적은 여전히 같은 궤도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이니, 과거부터 이어온 전제정치 제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중국 개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는 아주 중요한 명제 중 하나이다.
본 책은 역사의 맥락에 따라, 경제 제도의 변혁을 핵심 주제로 하여 진솔한 서술을 할 것이다.
제 1강과 2강에서는 중국이 대일통을 이루기 이전에 있었던 기원전 7세기의 관중변법과 기원전 4세기의 상앙의 변법이라는 중요한 두 개의 개혁을 살펴볼 것이다. 관중의 "사민분업(四民分业)"사상과 소금과 철의 국가 독점 정책을 기반으로, 상앙의 토지사유화와 군현제, 호적제, 군사작위제도를 토대로 각각 펼친 대범한 실험들은 모두 중국 역사 상 "최초로 시행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이 둘이 시행한 정책들은 통치 형태의 극치로 이제까지 펼쳐진 정책들 중 좌우 양극단에 서있는 모습과 같다.
3장에서는 "한무제의 개혁"을 중점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한무제가 시행한 반세기에 이르는 개혁을 통해 중국은 제국이라는 형태의 건설을 완료하였다. 또한 한무제는 "유학만의 숭상"을 주창하며 전 백성들에 대한 사상 통제 모델의 기초 형태를 다졌다. 그는 산업, 유통, 화폐 및 세금 등 경제의 핵심들을 아우르며 역사적으로 첫번째 전체주의적인 경제 개혁(整体配套体制)을 실시하였다. 후세의 많은 개혁들이 한무제의 이 개혁을 모방하였다. 제 4장에서는 왕망의 개혁을 다룬다. 이 유생(儒生)황제는 한무제의 극닫주의적인 개혁을 본떠 개혁을 하였다. 이 개혁은 세계에서 최초이자, 가장 짧은 기간동안 이루어진 고전 사회주의 실험이었다.
5장과 6장에서는 중화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번영, 번성했던 두 개의 왕조인 당나라와 송나라의 정치 개혁 개혁을 서로 구별하여 이야기한다. 당태종은 역사상 가장 작은 정부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고 "정관의치"라는 전성기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제도의 결함은 130년 이후 "안사의 난"이라는 재난을 불러일으켰다. 송태조 조광윤은 과감하게 지방 번진들의 권력을 빼았고,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 정부의 도전을 해결하였다. 경제적인 제도 부분에서의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북송 시기 왕안석의 개혁은 하나의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군주제시기에 일어났던 최후의 전제주의적 개혁이다. 동양과 서양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7장에서는 "명청 침체기"를 이야기하며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왜 수천년에 이르는 발전을 지나고 난 뒤, 중국은 500여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침체기에 빠져 버렸는가?" 명나라와 청나라 두 왕조의 나라의 문을 걸어 잠구는 쇄국정책은 겁을 잔뜩 먹은 소극적인 행위였으며, 자신감을 가지고 추진한 정책들은 중국이 경제적인 활력을 왜 잃어버렸는지, 과학 기술부분에 있어서의 창의성은 왜 퇴화하였는지, "男耕女织-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옷을 짜다"라는 사회경제 형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8장부터는 양무운동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환자'로서 세계화의 조류 속으로 빨려들어갔으며 적극적으로 개혁의 궤도를 새롭게 설정하였다. 양무운동은 중국 역사 상 처음으로 실시된 "외부로부터 받아들인输入式" 개혁이었으며, 이 시기의 고난들은 당시대 엘리트들의 모든 진을 다 뺴놓았다. 청나라 말기의 양무운동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거의 같은 시기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서로 완전히 달랐다. 그 기간동안 일어난 두 번의 国进民退는 후대의 사람들이 경계심을 가질만 하다.
9장에서는 "두개의 국민국가"가 내놓았던 그 개념에서부터 패턴까지 모두 의도와 반대로 시행된 두 개의 개혁 모델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방종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과도하게 시장경제를 자유롭게 풀어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제경제'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집권개혁이었다. 하나도 예외가 없이, 그들은 모두 실패하였다. 중국의 현대화 운동은 이 시기 실직적으로 나아가지도, 후퇴하지도 못하는 함정에 빠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