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강남지역은 대담한 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문화가 성숙하는 이유는 역시 그 기저에 일정한 정도의 사회안정과 그에 동반된 번영이 있기 때문이다. 무제는 토지를 잃고 고향을 떠난 농민에게는 관유지를 주거나 조세를 감면하거나 농사보호의 칙령을 내리거나 해서 그 보호를 꾀하였다. 그리고 즉위 초에 양질의 새로운 법정화폐를 상당히 강력하게 발행했다. 사실 이 통화정책이 당시의 경제발전과 사회번영에 상당히 효과적인 작용을 하였다.
송대에 방만한 통화정책 때문에 양질의 화폐가 격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송대 말기에서 남제시대에 걸쳐 엄격한 긴축정책을 실시한 결과, 경릉왕 소자량이 지적했듯이 양질의 화폐를 가진 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악질의 화폐밖에 쥐지 못한 농민은 점점 가난해져 갔다. 양무제는 소자량의 막하에 있을 때, 이 같은 지적을 듣고 사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했다. 그래서 즉위 초에 새로운 양질의 화폐를 발행하여 농민의 괴로움을 줄이고 사회의 화폐부족을 완화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화폐로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이 정책이 양대의 경제성장에 좋은 자극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양자강에는 2만 곡짜리 배라고 할 만한 대형 화물선이 물자를 수송하며 왕래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품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화폐의 수요는 더욱더 증가하는 법이다. 그러나 화폐의 원료인 동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수요에 비해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523년 무제는 통화를 동전에서 철전으로 전면적으로 전환한다는 지극히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관리에 대한 봉급은 모두 이 화폐로 지불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관리의 생활이 백 퍼센트 화폐경제 위에 성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철전은 초기에는 사회에서 보조화폐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철전이란 민간에서도 얼마든지 위조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530년대가 되자 철전의 가치는 급속히 하락되기 시작했다. 결국 철전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이때는 무제도 어쩔 도리가 없었고 그저 되어가는 형편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5세기부터 6세기 걸쳐 진전된 강남의 교환경제에는 화폐량의 부족이라는 악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때문에 앞서 지적한 대로 5세기 동안 정부는 악질 화폐를 발행하고 수량을 증가시켰으나 그것이 실패하자 긴축정책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양질의 화폐를 쥔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었고, 악질의 화폐 밖에 손에 넣을 수 없는 하층의 빈민은 더욱 궁핍해져 갔다.
그러나 6세기가 되자 양무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이 사태를 완화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인 완화책일 뿐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한 완화 상태 속에서 양의 문화가 개화하였다. 그러나 상층계급이 만개한 문화에 취해 있을 동안 빈부의 격차는 더욱더 심해지고 있었다. 철전정책의 실패는 이 경향에 박차를 가했다. 농민의 유망은 더욱 심해지고 실업자가 점차 늘어났다.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어진 무제는 점점 불교신앙에 빠져들어 도피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무신경했던 황족과 고급 장관들의 상층부는 귀족과 함께 사치에 빠져 무아지경의 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순간의 환락을 위하여 태산 같은 재산을 소비한다. 이것이 세상의 풍조가 되고 게다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당시의 한 식자는 지적하였다. 5세기 은행의 호사스러운 생활은 당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같은 사치보다는 보다 넓은 계층으로 퍼져 나갔다.
소위 상류사회에는 소비열풍이 불고 있었다. 속속 들어서는 사원이나 이 사원에 대한 거액의 희사도 또한 이 무렵 소비열풍의 일종이었다. 무제 스스로 ‘삼보의 노’가 되어 사원에 몸을 던졌고, 정부는 노예가 된 이 황제를 속신시키기 위해 억만전을 사원에 지불해야 했다. 이것이야 본래 무제의 신앙문제라고 하겠지만, 사회적,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 또한 소비열기를 부채질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