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0년 12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던 인민군 잔류병들의 유격활동이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기를 띠었다. 특히 산간마을은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지배하는 양상이 되풀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산간마을 청장년들은 대부분 군경 아니면 인민군에 편입되고 마을에는 여자와 노약자만 남아 있었다.
거창군 신원면도 그런 지역의 하나였다. 공비 토벌을 위해 창설된 육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은 1951년 2월초 제9연대(연대장 오익경)를 파견하여 지리산 남부지역의 공비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는데, 그 가운데 제 3대대(대대장 한동석)는 신원면을 장악하였다.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 와륭리 주민 1000여 명을 신원초등학교에 수용한 제3대대는 군경 및 유지 가족을 가려낸 나머지 600여 명을 박산 골짜기로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집단학살하고서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대대장 한동석은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현장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옮겨 암매장했다. 그러고 나서 공비와 통비분자 187명을 처형했다는 엉터리 보고를 올려 사건을 은폐하였다.
거창군 출신 신중목 의원이 이 만행을 폭로함으로써 국회가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지에 파견했으나,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휘하병력을 공비로 가장시켜 이들에게 위협사격을 가함으로써 조사단은 서둘러 철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