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점초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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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곽점 위치

곽점초간(郭店楚簡)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형문시(荊門市) 곽점(郭店) 1호 초묘(楚墓)에서 출토되었다. 곽점 1호 초묘는 전국 시대 나라 수도 영(郢)의 옛 땅인 기남성(紀南城) 북방으로 약 9킬로미터 지점에 있고, 그 일대는 수많은 초나라 묘가 밀집해 있어 광대한 묘장군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다.
호북성 형문시박물관의 <형문곽점1호초묘>에 따르면 1993년 8월 23일에 처음으로 도굴이 있었는데, 그때는 관 바깥 부분을 둘러싼 외각에 미치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10월 중순에 다시 도굴을 당했고 정판 덮개에 가로 40센티미터 세로 50센티미터의 장방형 구멍이 뚫려, 부장품 일부가 도난당하고 묘 가운데 기물도 파손되어 여기저기 흩어지고 빗물과 흙이 정실까지 침투된 상태였다. 그래서 급히 10월 18일부터 24일까지 호북성 형문시박물관은 발굴 조사를 행했는데, 이때 예기(禮器), 악기(樂器), 병기(兵器), 생활용품 등 다수의 부장품과 함께 804매의 죽간, 즉 곽점 초간이 발견되었다. 묘장의 구조나 부장품의 특징으로 판단하건대 곽점 1호 초묘는 전국 시대 중기 후반의 특색을 띠며, 이장 연대는 기원전 4세기 중순부터 기원전 3세기 초반으로 추정되었다.
형문시박물관을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곽점 초간을 정리 및 해석하였고, 1998년 5월에 문물출판사에서 전간의 도판과 해석문 주석을 담은 형문시박물관 편 《곽점초묘죽간》이 발행되었다. 곽점 초간의 발견은 제자백가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시대의 무덤에서 당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미지의 저작물이 한꺼번에 출토된 점에서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1]

구성

곽점초간 《노자(老子)》, 《태일생수(太一生水)》

1998년 5월 문물출판사에서 전간의 도판과 해석문 주석을 담은 형문시박물관 편 《곽점초묘죽간》이 발행되었는데, 그 책에 의하면 죽간은 길이·글자체·내용 면에서
《노자(老子)》(갑을병), 《태일생수(太一生水)》, 《치의(緇衣)》, 《노목공문자사(魯穆公問子思)》, 《궁달이시(窮達以時)》, 《오행(五行)》, 《당우지도(唐虞之道)》, 《충신지도(忠信之道)》, 《성지문지(成之聞之)》, 《존덕의(尊德義)》, 《성자명출(性自命出)》, 《육덕(六德)》, 《어총일(語叢一)》, 《어총이(語叢二)》, 《어총삼(語叢三)》, 《어총사(語叢四)》의 16종류로 분류된다.
이 중에서 《노자》와 《태일생수》는 도가(道家), 그 외 대부분은 유가(儒家)를 중심으로 한 저작물로 보이고, 《노자》와 《치의》 외에는 이미 여기저기로 흩어져 없어진 상태다.[2]

의의

중국 사상사적 의의

곽점 초간 中 《육덕》인용부분

《역경》은 원래 점술 관련 도서이며, 유교 경전으로서 입지를 갖춘 시기는 진한(秦漢) 이후로 보는 것이 이전까지의 통설이었다.
예를 들면 타케우치 요시오는 《중국사상사》[3]에서 공자와 그 제자들은 《역경》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고 전국 시대 중기의 《맹자》에도 언급이 없으며, 전국 시대 말 《순자》에서 《역경》을 인용한 두 군데도 후대에 부가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역경》은 공자에서 맹자, 순자에 이르기까지 유교의 경전이라고 여기지는 않은 것 같다”고 서술하고, 오경을 불태워 버린 시황제의 분서(焚書)를 피해 살아남은 《역경》을 추가해서 진대 이후 육경이 성립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히라오카 다케오는 《경서의 성립》[4]에서 공자와 제자의 문답에 《역경》을 경전으로 한 명확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춘추의 경우처럼 한대(漢代)가 되어 ‘역’의 학문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드디어 한대 경학(經學)의 이념으로 체계가 정비되어 경전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서술하며, 《역경》이 경전이 된 시점을 한대 이후로 보았다.
그러나 곽점 초간 《육덕》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觀諸詩書, 則亦在矣. 觀諸禮樂, 則亦在矣. 觀諸易春秋, 則亦在矣.

이것을 시와 서에서 보면 즉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예와 악에서 보면 또한 있는 것이다. 이것을 역과 춘추로 보면 역시 있는 것이다.

또한 곽점 초간 《어총일》에도 “시는 고금의 의지가 만나는 이유가 된다.”“예는 이것을 합쳐서 행하는 것으로 진술할 수 있다.”“약은 혹은 생겨나고 혹은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역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만나는 이유가 된다.”“춘추는 고금의 것이 만나는 이유가 된다.”(‘서’와 관련된 부분은 누락됨)라고 기술되어 있다. 시·서·예·악·역·춘추, 이 여섯이 바로 유교 경전이다. 즉 <육경>은 곽점 초간 이전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곽점 1호 초묘의 이장 연대는 묘장의 구조와 부장품의 특징으로 볼 때 전국 시대 중기 후반인 기원전 4세기 중순부터 기원전 3세기 초로 추정된다. 따라서 곽점 초간의 필사 연대는 그 이전일 테고, <육경>의 성립은 늦어도 전국 시대 중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결국 《역경》이 유교 경전에 포함된 시기는 통설처럼 진한 이후가 아니라 전국 시대 중기 이전이었음이 판명된 것이다.
특히 《역경》의 인용에서 진대 이후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예기》의 <표기(表記)>, <방기(坊記)>, <치의>에 대해서도 곽점 초간에 <치의>편에 해당하는 저작이 포함되어 있는 점은 <치의>편이 전국 시대 중기 이전에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곽점 초간에 의해 《역경》은 이미 전국 시대 중기 이전부터 유교 경전으로서 인정받고 있었으며 <육경>의 성립 시기도 전국 시대 중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이 실증되었다.[5]
또한 곽점 초간은 정식 출간 전부터 세간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는 다름 아닌 현존 최고(最古)의 <노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전국 시대에 이미 <노자>라는 텍스트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입증되었으나, <노자>의 저자나 진위, 성립시기, 텍스트의 형성과정, 유가와의 관계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죽간본 <노자>는 총 2천46자로 통상 5천자로 알려져 있는 통행본의 약 40%에 불과하다.[6]

문자학적 의의

전국초간 中 왼쪽부터 포산 초간, 신양 초간, 망산 초간

이전까지 알려진 포산 초간·신양 초간·망산 초간 등의 전국 초간은 주로 부장품 목록인 견책이나 사법 문서, 일상의 점술을 기록한 복서 및 제사 관련 기록 등이었다. 이들은 내용이나 성격을 고려할 때 초의 묘주 주변에서 작성되거나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사상관계 서책인 곽점 초간은 예를 들면 공자의 손자에 해당하는 자사(子思)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치의》, 사상 내용에서 자사와의 관련성이 엿보이는 《오행》, 그리고 자사의 노나라 목공과의 문답인 《노목공문자사(魯穆公問子思)》 등 자사 및 그 후학이 쓴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 원본은 자사학파의 거점이었던 노나라와 제나라의 직하 등에서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국지도(노(魯)는 제나라의 옆에 존재했음)

이러한 점을 근거로 곽점 초간에는 동방의 제(齊)와 노(魯)에서 제작되어 어떤 형태로든 남방의 초(楚)에 유포된 서책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고, 유포 과정에서 시대나 필사한 사람 등 다양한 여러 요소, 특히 초나라 이외의 지역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곽점 초간에 대해 검토한 논문으로는 저우펑우의 《곽점죽간의 형식특징 및 그 분류의의》[7]가 있다. 여기서 저우펑우는 글자체의 관점에서 곽점 초간을 이하 4가지로 분류하였다. 제 1류는 초 간백(簡帛)(비단에 쓴 편지)의 표준 자체이고, 제 2류, 제 3류, 제 4류는 제와 노의 문자와 관령성이 보이며, 특히 제 4류는 제문자의 특징과 가장 잘 합치한다.

곽점초간 왼쪽부터 제 1류: 노자갑, 제 2류: 성자명출 , 제 3류: 어총일, 제 4류: 당우지도

제 1류 《노자갑》《치의》《오행》《노목공문자사》《궁달이시》《노자을》《노자병》《태일생수》《어총사》
제 2류 《성지문지》《존덕의》《성자명출》《육덕》
제 3류 《어총일》《어총이》《어총삼》
제 4류 《당우지도》《충신지도》
저우펑우는 동방의 제와 노로부터 유입된 서책이 남장의 초에서 유행하는 과정에서, 전사(轉寫)에 의해 제나 노의 문자가 초의 문자로 치환되는 현상을 ‘순화(馴化)’로 보고 제 4류부터 제 1류까지 순화의 정도를 단계적으로 파악하였다. 이전까지 초묘에서 출토된 문자를 초계문자(楚系文字)로 칭하고 그것이 초 고유의 문자라는 암묵적인 전제하에 토론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주봉오의 견해는 이러한 초간문자에 대한 기존 이해를 재고하는 주장으로서 주목된다.[8]
하지만 저우펑우가 제시한 논거만으로는 곽점 초간과 제나라 문자와의 관련성을 실증하기는 곤란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향후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저우펑우는 제나라 문자와의 관련성을 판별하는 중요한 지표로 제 3류, 제 4류의 ‘자者’자를 들었지만, 그 형태는 동방 계통의 금문뿐만 아니라 남방 계통의 금문과도 유사성을 보이는 예가 나타나고 이것이 동방의 제, 노 고유의 문자였는지 남장의 초에도 있었던 문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피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다른 지역 문자와의 혼란이라는 문제도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저우펑우가 제기한 서책의 전사로 인한 순화라는 관점 이외에, 전국 시기 제자백가의 광범위한 활동이나 제의 직하에서 천하의 학사들이 집결하고 분산하던 인적 교류 측면도 고려할 수 있다.[9]

  1. 후쿠타 데쓰유키, 김경호·하영미 옮김,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20세기 중국 출토문자의 증언)”, 너머북스, 2016, pp. 87-89
  2. 후쿠타 데쓰유키, 김경호·하영미 옮김,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20세기 중국 출토문자의 증언)”, 너머북스, 2016, p. 89
  3. 타케우치 요시오, “중국사상사”, 岩波書店, 1936.
  4. 히라오카 다케오, “경서의 성립”, 全國書房, 1946.
  5. 후쿠타 데쓰유키, 김경호·하영미 옮김,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20세기 중국 출토문자의 증언)”, 너머북스, 2016, pp. 96-99.
  6. 이승율, “해외동향_출토문헌 연구로 부활하는 중국고대사상사” 교수신문,2006.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0365
  7. 周鳳五, 《郭店楚簡的形式特徵及分類意義》, 무한대학 중국문화연구원 편, 《곽점초간 국제학술연토외 논문집》, 호북인민출판사, 2000.
  8. 후쿠타 데쓰유키, 김경호·하영미 옮김,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20세기 중국 출토문자의 증언)”, 너머북스, 2016, pp. 101-102.
  9. 위의 책 pp. 10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