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 유지
국내성(國內城)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다. 국내성의 역사는 고구려의 두 번째 왕인 유리왕 22년(서기 3)에 도읍지를 졸본 지역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국내성은 42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로서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 이후 장수왕 12년(427)에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렇게 국내성은 고구려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도성의 자리를 지키며 고구려의 전반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이러한 점에서 국내성을 자세히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1.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의 천도
먼저 고구려가 왜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이것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설화가 존재한다. 바로 ‘돼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할 당시 고구려는 유리왕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왕은 뒤늦게 고구려 초기 정치권력에 합류한 사람으로서 고구려의 건국세력에 비해서는 한참 권력이 부족했다. 이에 유리왕은 졸본 지역의 토착세력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지만 왕비는 2년 뒤에 죽어버렸다. 그 이후 다시 두 여자들을 맞아들이지만 두 여인들이 질투하고 싸우는 등 평온한 날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리왕은 국가의 큰 제사인 ‘교제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물로 바칠 돼지가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리왕은 사적으로 일이 풀리지 않는 과정에서 교제사를 위한 제물까지 사라지며 설상가상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분노한 유리왕은 희생제물을 관리하던 탁리와 사비에게 돼지를 쫒아가라고 했다. 탁리와 사비는 돼지를 쫓아가서 돼지의 다리를 잘라버렸다. 하지만 유리왕은 탁리와 사비가 저지른 신성한 제물의 훼손에 대해 더욱 화가 나서 이들을 구덩이에 넣어 죽게 했다. 시간이 지나고 다음의 ‘교제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돼지가 또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희생제물을 담당하던 ‘설지’가 ‘국내 위나암’까지 좇아가서 돼지를 잡았다. ‘설지’는 돌아와서 유리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내 위나암에 갔더니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곡식 농사를 짓기에 편하고, 물고기가 풍부합니다.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이로움이 끝이 없을 것이고, 군사를 일으키는 어려움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유리왕은 ‘국내 위나암’을 둘러보고 매우 흡족해했으며 그 이후 도성을 쌓고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2.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관계
이렇게 돼지에 관련된 설화를 통해서 국내성의 지리적 조건이 천도하기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유리왕은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환도산성(위나암성)을 축조했다. 왜냐하면 환도산성(위나암성)은 국내성의 방위성으로 가장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즉, 현재 ‘산성자산성’의 위치로 추정하는 환도산성(위나암성)은 국내성지의 서북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집안 평야에서 북쪽으로 가는 두 개의 길을 지키면서 나들목 역할도 했다. 결국, 국내성과 환도산성(위나암성)의 관계는 평지성과 배후산성의 관계로 볼 수 있다. 평상시에는 평지성인 국내성에 거주하다가 적이 쳐들어오거나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방어력이 높은 환도산성(위나암성)으로 대피하는 것이다.
3. 국내성의 위치 및 모습
국내성 터는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 압록강 북쪽 방면의 통구분지에 위치해있다. 통구분지는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의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온 노령산맥이 감싸고 있다. 현재의 지리적 위치를 통해서도 국내성이 오랜 시간동안 고구려의 수도 역할을 잘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성지는 통구분지의 서쪽 부근에 위치했었고, 국내성지의 평면은 네모꼴로서 각각 동벽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로서 총 둘레는 대략 2,686m에 달한다. 국내성은 잘 다듬어진 쐐기형 돌로 축조되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네 개의 성벽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1920년대 이래 개축이 되면서 성곽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고, 1960년대 이래 집안시의 시가지를 개발하면서 성곽이 많이 훼손 및 파괴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대식 건물들이 건축된 것이다. 하지만 발굴 작업은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성벽과 성문, 도로와 배수로 그리고 건물과 관련된 고구려 유적들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4. 국내성의 미래
국내성은 42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427년에 평양성으로 수도가 옮겨지면서 고구려를 총괄하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중심지라는 위상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국내성은 별도(別都)로서 평양성에 못지않은 번영을 누렸다. 환도산성의 궁전 터가 6세기에도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왕릉급 벽화고분이 6~7세기에도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5. 출처
고구려연구재단(임기환 외 18명), <고구려 문명기행>, 고구려연구재단, 2005.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를 찾아서>, 동북아역사재단, 2009.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도성과 성곽->, 동북아역사재단,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