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제
위진남북조, 특히 위진 · 남조 시대는 정치와 사회 체제로서 귀족제가 보편적이었다. 귀족은 당시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세력으로서 군주의 권력을 일정 정도 제약하여 서양 중세의 영주에 비견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서양의 영주처럼 장원 등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반드시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문인 귀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 귀족계층은 외척과 환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여 당쟁을 벌였던 후한 말 청류파에 그 사상적 원류를 두고 있다. 이들이 세습적인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의 시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사 씨로 대표되는 북방 교민 귀족들은 강남 토착 호족인 주·장·고·육 씨 등과 협력하여 동진에서 귀족제를 부활시켰다. 동진 건국과정에서 공훈을 세운 왕씨는 “와과 사마가 함께 천하를 다스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했다. 이 말은 귀족세력이 군주의 권력을 제약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국사에서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관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 이후 왕조에서는 낮은 가문 출신의 창업자가 계속 출현함에 따라 귀족과 군주는 별개로 움직였다. 귀족은 관직과 가문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쏟을 뿐 국사에는 무관심했다. 귀족의 실무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은 한문(寒門)·한인(寒人)들의 정치참여를 초래했고, 송·제·양·진은 한문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 가운데 양 무제는 한문·한인과 귀족층을 결합한 통일적 관료체제를 지향하는 소위 천감개혁을 실시하여 지배층의 분열을 봉합하려 했다. 그 결과 ‘50년간 강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태평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양 말에 일어난 후경의 난의 진압과정에서 남조 귀족의 무능함이 유감없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대량 살육됨으로써 귀족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