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우치 요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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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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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0.10.2
일본 나가노현 미나미사쿠 군
사망 1977.3.3
주요 작품 근대적 초극, 루쉰,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등등
관련 활동 중국학자, 문학평론가


문학은 행동이다. 관념이 아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행동을 소외함으로써 성립하는 행동이다. (...) 문학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치다.

 
—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개요

일본 나가노 현(長野県)에서 태어난 중국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구제(舊制) 오사카 고교(大阪高校)를 졸업해 1931년에 도쿄 제국 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의 지나문학과(支那文学科)에 입학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4년 3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中國文學硏究會)를 결성하고, 1935년부터 『중국문학월보(中國文學月報)』를 간행하며 본격적인 중국문학 연구의 초석을 다진다. 1937년부터 2년 동안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유학한다. 1960년대 안보투쟁(安保闘争) 당시 안보 개정안 강행 처리에 항의하여, 당시 몸담고 있던 도쿄 도립대학 인문학부 교수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뒤 잡지 『주고쿠(中国)』를 간행하고, 만년에는 루쉰(魯迅)의 문학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생애

다케우치 요시미는 1910년 10월 2일 일본 나가노 현 미나미사쿠 군 우스다마치에서 태어났다. 1931년 4월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지나(支那)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2년 8월, 외무성의 지나문화사업부에서 주관한 “조선 만주견학 여행”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조선 각지를 거쳐 창춘까지 간 후, 베이징에서 사비로 잠깐 머문 뒤 2개월 후인 10월에 귀국하였다. 34년 3월에 졸업 논문 『위다푸(郁達夫) 연구』를 발표하며 대학 과정을 마친다. 남만주철도에 취직을 기대했던 적이 있지만, 7월 2일 정식으로 거절당했다.

이듬해 3월 1일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오카자키 토시오(岡崎俊夫), 마쓰다 쇼(增田涉), 마쓰에다 시게오(松枝茂夫)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中國文學硏究會)를 결성하였다. 모임을 이어 오면서 중국문학연구회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4일 도쿄 히비야에서 저우쭤런(周作人)의 환영회를 개최했을 당시부터였다고 전해진다. 35년에는 모임의 기관지로서 『중국문학월보(中國文學月報)』를 창간했다. 그는 『중국문학월보』제 20호 <루쉰 특집 호>를 편집하기 위해 루쉰의 『고함(吶喊)』, 『화개집(華蓋集)』 등의 작품을 읽고 감상으로 「루쉰론」을 썼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루쉰론이기도 하며, 그의 루쉰 이해의 원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문학월보는 후에 『중국문학(中國文學)』으로 개칭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당시 팽배해 있던 일본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연구회의 유지가 점점 어렵게 되자, 1943년 연구회를 해산하고 기관지(당시 192호까지 창간됨)도 폐간했다.

37년 10월, 다케우치 요시미는 외무성 문화 사업부의 보조를 받기로 한 뒤, 2년간 어학연수를 하러 베이징으로 출발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41년 5월부터 『루쉰』 집필을 시작하였고, 2년 뒤 12월에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후베이성에 파견되었다. 이때 다케우치 요시미는 복잡한 심정으로 집필을 마친 『루쉰』 원고를 다케다 다이쥰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쥰의 발문과 함께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 49년 3월부터 게이오대학의 문학부에 시간강사, 도쿄도립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는데, 60년 5월 안보투쟁에 참여해 미일안전보장개정조약에 반대를 표하는 과정에서 도쿄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임한다. 전후에는 주로 루쉰 작품의 번역, 평론과 일본문화에 관한 평론, 논문 등을 썼다. 일본 공산당을 비판, 국민문학논쟁, 안보조약변경 반대 운동 등에 참가하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다, 식도암에 의해 1977년 3월 3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

루쉰

1943년 12월에 다케우치 요시미는 소집 명령을 받고 일개 병사로서 중국에 종군했다. 이때 유언의 심정으로 쓴 『루쉰』의 원고를 다케다 다이준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준의 발문을 붙여서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루쉰』의 본문은 루쉰의 죽음과 삶에 관해 사실에 근거한 접근을 시작으로 루쉰의 전기에서 발생하는 의문을 되짚고 그의 사상과 작품, 그리고 5장에서는 루쉰이 생각하는 문학과 정치의 관계, 나아가서는 계몽가, 혁명가로서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면서 루쉰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루쉰』이라는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37년 7.7사변이 발생한 직후, 다케우치는 10월에 베이징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의 베이징에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사람들의 거의 없는 모습이었는데, 이 광경을 본 그는 베이징의 무력함을 느꼈고 더 나아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전 일본 학계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문학의 궁극적인 의미와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그 구체적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케우치는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와 '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고 출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양은 서구의 근대주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서양 근대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 역시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 또는 새로운 근대의 창출을 목표로 했던 다케우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쉰을 그 가능성의 근간으로 삼아서 연구하였다. 그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이 『루쉰』 인 것이다.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경대 졸업 이후 ‘중국 문학 연구회’로 활동할 당시 불거졌던 지나학에 대한 논쟁에 있다. 지나학은 기존의 구(舊)한학의 비과학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학문으로 학술연구의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고전을 실증적 태도로 재해석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는 지나학이 구한학과 마찬가지로 ‘현실생활에서의 유리, 삶에 대한 열정의 결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책상머리의 학문’이기 때문에 “사상을 낳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논쟁에서 ‘현실의 혼탁함을 직시’하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당대 일본의 역사성과 상황성에 개입하라는 요구였다.[1] 그는 중국학 연구의 분야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 평론계 전체를 향해 일본 근대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주 내용은 ‘일본의 근대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시 근대화의 우등생이라고 자부하던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 글에서 동양의 근대화는 서구의 침입에 의해 자신들이 ‘비서양’ 즉, ‘동양’이라는 자각을 함으로써 발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근대화와 일본의 근대화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케우치가 서구의 '근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시했던 부분은 자기인식, 즉 자각임을 알 수 있다. 유럽이 '의심하는 나를 의심할 수 없다'는 근대정신에 의해서 계속되는 자기 갱신의 긴장속에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성립한 유럽의 자기보존운동이 자기확장적인 형태로, 즉 동양을 포함한 비서구에 대한 침입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았다.[2]

근대적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의 근대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적 초극이란 1942년까지의 논의(좌담회, 문학계에 집필된 『근대적 초극』을 뜻함)을 뜻한다. 즉, 근대적 초극이란 일반적으로 성전의식에 기조가 되는 말이었으며 일본 군국주의 지배하의 총력전에 협력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근대적 초극’과 같은 전쟁에 관련된 단어 사용을 금기시 했다. 따라서 『근대적 초극』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근대적 초극’이라는 사상에서 서양에 대립하는 동양의 저항이라는 사상을 취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즉, 그 사상적 배경에는 독자적인 동양주의나 일본주의를 통해 서구 근대에 대항하려고 한 근대비판이 있었음으로 단순히 전쟁협력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비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다케우치 요시미는 ‘성전의식의 기조’라는 부정적 근대적 초극의 의미에서 ‘일본주의, 아시아 주의를 통해서 서양에 대립하자’라는 좋은 사상만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다케우치 요시미는 『근대적 초극』이라는 문장에서 ‘사상’과 ‘상징’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상’은 동양주의나 일본주의를 통해 서구 근대에 대항하려고 하는 근대비판을 의미하고, ‘상징’은 성전의식의 기조가 되는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현재 ‘근대적 초극’이라는 단어 내에는 ‘사상’과 ‘상징’이 서로 혼재되어 있으며, 다케우치는 이러한 혼재된 단어 내에서 ‘사상으로부터 이데올로기를 떼어 내는 것’ 혹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사상을 추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며 비판을 한다. 다케우치의 입장에서 ‘근대적 초극’이라는 문제는 일본 근대의 문제가 함축되어있는 문제였는데, 사상가들은 이를 전쟁과 관련된 단어라고 치부하고 방치한 것이다. 이에 다케우치는 ‘근대적 초극’에 대한 논의의 회피가 일본 ‘사상’ 전통의 수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자세 자체가 바로 일본 근대의 가장 큰 폐단이었다고 주장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다케우치 요시미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이전의 사상가들이 쓴 글과 달리 일본의 패전 이 후에 쓰인 것으로 가장 눈여겨 볼 점은 일본의 전후 반성과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중국과의 비교를 통하여 일본을 바라보는 점이다.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아시아, 특히 중국이 가지는 의미는 결과적으로 일본을 돌아보는 반성과 성찰을 다루고 있으며 저자가 중국에 관심을 가지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일본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의 비교를 통해서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되감기

유럽 근대성은 시간이 지나자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은 유럽 내부에서 ‘반근대’라는 형태로 등장했다. 아울러 비(非)서구(동양)와의 접촉으로 비서구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와 동시에 서양 근대에 모순에 대한 저항으로써의 ‘근대의 극복’이란 두 가지 과제를 품고 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양의 ‘저항’에 의해 서양이 동양의 가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동양이 서양의 근대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접한 뒤 서양은 역으로 근대적 모순의 해결법을 ‘동양적 가치’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보인다.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한 ‘되감기’이다. 여기에 대하여 다케우치는 ‘서구적인 우수한 문화가치를 보다 대규모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서양을 한번 더 동양에 의해 다시 싸안아서 역으로 서양 자신을 이쪽에서 변혁한다는 이 문화적인 되감기 또는 가치상의 되감기에 의해 보편성을 이루어냅니다. 동양의 힘이 서양이 만들어낸 보편적인 가치를 보다 높이기 위해 서양을 변혁합니다. 이것이 동과 서의 현재의 문제입니다.’라고 표현했다. 즉, 이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계사의 추구’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저항

다케우치는 동양이 유럽의 침입으로 인해 비로소 동양이란 자기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또 이렇게 유럽에 의해 자신이 비서양 즉 동양임을 인식하게 된 동양은 자연히 ‘저항’을 통한 근대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현재 서양의 근대는 모순이 많았고, 이에 따라 동양은 ‘근대의 추구’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의 모순에 대한 저항인 ‘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의 근대화를 모두 이룩해야했다. 따라서 저항을 통해 동양은 자신을 근대화했는데, 이 저항은 ‘근대화의 모순’에 대한 저항 뿐 아니라 서양과 동양의 근대화가 다르다는 동양 근대화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런 저항이 없는 것은 동양에 대한 주체성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저항이 없는 동양은 동양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동양이 유럽에 의해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그 유럽의 영향 하에서 근대화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동양의 근대화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고 정리했는데, 그것이 바로 ‘전향형’과 ‘회심형’이었다. 이것은 각각 일본형과 중국형으로 대표된다. ‘전향’이란 바로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그것의 대표인 일본은 우등생문화에 의해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근대화를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이 우등생문화는 일본이데올로기를 창출하여 일본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왔고 그것을 국민에게 주입함으로써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했으며, 전후의 고도성장은 그 흔들렸던 신화를 교묘히 유지해가는 것을 가능케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다케우치에게 있어서 동양은 무엇보다 저항을 갖지 않는다면 ‘동양’이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당시 일본의 사상은 주체성이 없었으며, 다케우치는 일본 또한 본인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기 위해 서구에 대해 회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유럽의 근대는 자기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하고 진보의 운동을 해나가는데, 그 가공할 힘은 서양에 대해 회의한다고 생각하는 다케우치 요시미 자신의 사유까지도 유럽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로 이끌어 간다. 즉 모든 것을 회의하고 부정하지 않으면 어느새 동일성의 강력한 힘은 동양을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즉, 다케우치 요시미의 ‘저항’이란 서양에 대한 ‘회의’와 ‘부정’의 연속으로 주체적인 ‘동양’을 지속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 문학의 특징

挣扎적태도

다케우치 요시미는 挣扎를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 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 즉, 해석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의 고뇌와 마주하게 하는 매체’라고 말하였다. 대립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모순적인 사물의 양극을 주체 속에 두고서 주체의 부정적 개입을 통해 새로운 주체적 정신을 기르는 것. 이 과정에서 부단히 자기를 갱신하고 자기를 창조하는 것. 즉, 상대방에게 저항과 수용을 동시에 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예시로 중국을 일본의 상대로 두고 이 둘을 비교하며 자신에 대해 단점을 고뇌하며 중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일본을 설립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挣扎적태도를 취할때에는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보면 안된다. 즉, 挣扎적태도를 취할 때는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관성이 개입이 된다면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에 화중취율의 자세를 견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 파시스트에게서 자신의 사상을 찾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분명 이들의 사상은 절대적으로 보았을 때 단점이 많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파시스트의 사상 속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 속에서 장점만을 취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리해서 '挣扎'를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면, 자신의 모순을 상대방에게 대상화해서 그것과 싸우는것, 타자와의 투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는 것이다. 이런 '挣扎'라는 자기부정의 방식은 사상의 변화라는 측면보다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변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또 이것은 언제 어디서 형성되었는지를 발견하는 노력으로 다케우치를 이끌고 간다. 그것이 바로 '회심(回心)이다.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운동방식이 '挣扎'라고 한다면, 그 사상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이 바로 이 '회심'이다.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학론뿐만 아니라 사상 이해의 근간이다. '회심'을 넓힌다면 국가와 민족, 아시아에 대한 이해로 확대된다.

평가와 비판

전쟁과 관련된 기억은 되도록 말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린 전후 일본사회의 풍토에서 ‘근대의 초극’은 잊혀져야 할 과거의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근대의 초극’ 박멸론이 우세 하던 상황에서 과감하게 『근대적 초극』을 발표하여 ‘근대의 초극’에 대한 재 평가를 요구한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초극론자’라는 수식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근대적 초극』의 내용을 보면 다케우치 요시미가 ‘근대의 초극’ 논의를 검토하면서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한 것은 단순히 근대적 초극의 재평가가 아닌 근대 일본의 ‘사상’의 형성과 관련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초극’은 일본 근대의 문제가 집중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이고 이것 과 진정하게 부딪혀 보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결국 일본 ‘사상’ 전통 의 수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자세 자체가 바로 일본 근대 의 가장 큰 폐단이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근대의 초극’이란 부정적인 유산 속에서 ‘사상’의 계기를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것에서 그의 ‘화중취율(火中取栗)’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언어적 의미에서 ‘초극론자’ 또는 ‘반근대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다케우치가 ‘근대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의 ‘근대’에 대한 인식도 원칙적으로는 ‘근대주의’ 또는 ‘역사주의’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보면 그의 시각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이해하고, 서구 근대 발전론의 시각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선진과 후진을 대립시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면에서 그는 분명 ‘근대주의자’다. 하지만 동양과 아시아주의를 말하고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또 ‘반근대주의자’다. 이와 관련해 사카이 나오키(酒井 直樹)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다케우치요시미는 근대를 긍정적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한 비판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 비판은 그의 이러한 저항관에 유래하고 있다.이 저항관이야말로 근대를 초극하는 가능성을 단순히 믿었던 자와 다케우치를 확실히 구별해주는 것이다. 근대주의에 깊이 침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대한 유효한 비판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다케우치가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루쉰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이와 같이 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근대라는 말이 환기하는 불확실한 느낌은 이러한 저항이 점차 산종(散種)해가는 어떤 사태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루쉰 속에서 보았던 것에 강하게 이끌려 대면했을 때 ‘유희(戯れ)’라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아시아와 관련된 글 중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침략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침략에는 연대감의 왜곡된 표현이라는 측면도 있다.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건전하기까지 하다’ ‘나는 무능한 사회주의자보다 유능한 파시스트를 유산으로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와 같은 구절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는 만들어졌다. 세계는 하루아침에 변모했다.’ 라고 시작되는 대동아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과거도 있다. 이 구절들을 보면 그는 극우주의라고 여겨진다. 이에 당시 일본 사회는 그를 ‘우익적인 아시아주의가 표면에 흘러 넘친다.’고 표현했고, 함동주씨는 이를 ‘아시아주의를 연대 의식 위주로 고찰하여 긍정적인 면을 밝히는 데 집착한 결과 아시아주의에 내재된 침략 이데올로기로서의 면모를 축소 해석했다. ‘고 평가했다. 이에 반하여, 이것은 그의 사유방식에서 오는 오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쑨거는 그의 많은시국판단의 착오에 대해 ‘그가 자신의 입장이 정확한가에 대해 질문하고 그 잘못에 대한 반성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지식인과 달리 다케우치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역사로 진입하는가의 문제였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대동아전쟁에서 이를 옹호한 것은 대동아 전쟁을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하여 서방에 도전한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감동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작품 목록

  • 아래 표는 수업과 연계된 다케우치 요시미의 대표작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목 특징 수업과의 연계
루쉰 1944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1948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근대적 초극 1959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1961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참고자료

1)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저
2) 서광덕. (2003). 타케우치 요시미(竹內好)가 지핀 ‘루쉰’(魯迅)이란 불. 진보평론, (16), 233-255.,
3) <근대의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 저

4) 류세종. 2004. 서평 :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3. 10, 크라운판, 220쪽.). 중국어문학, 44(0) : 607-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