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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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통상 명칭: 타이완(臺灣), Taiwan

공식 국호: 중화민국, 중국의 ‘하나의 중국’원칙에 따라서 ‘차이니즈 타이베이(Chinese Taipei)’로 호칭되기도 함

정치체제: 입헌민주공화제

국경일: 10월 10일, 쌍십절(雙十節)

수도: 타이베이


대만의 역사

1. 타이완의 네덜란드 식민시기 이전 역사(~1624년)

선사시대의 타이완에는 말레이-인도네시아 계통의 종족이 거주했다. 이후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타이완에 정착하였다. 1590년에는 일단의 포르투갈 선단이 타이완에 도착하였다가, 타이완 북부지역에 잠시 거주하였다. 이들은 타이완을 ‘아름다운 섬(Ilha Formosa)’이라고 부르고 타이완을 이 명칭으로 서양에 소개하였다.


2. 타이완의 네덜란드 식민시기(1624년~1662년)

1624년 네덜란드의 동인도(東印度)회사가 타이완(臺灣) 남부의 젤란디아(Zeelandia) 요새와 현재의 타이난(臺南) 지역에 ‘안핑(安平)’이라는 소규모 거주지를 건설하였다. 1626년에는 스페인이 현재의 지룽(基隆)에 요새를 건설하고, 산살바도르(San Salvador)로 불렀다. 1642년 필리핀 내란으로 인해 스페인의 타이완 북부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상황에서 네덜란드가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북부 지역까지 점령한 후, 젤란디아 요새를 식민수도로 결정하고 1642년부터 동인도회사를 통해 타이완을 관할하였다. 한편, 1644년 만주족이 명(明)나라를 침입하여 중국 대륙이 혼란에 휩싸이자, 중국 푸젠성(福建省) 남부, 광둥성(廣東省) 동부 지역의 많은 중국인들이 대륙으로부터 타이완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중국 본토에서 만주족의 대륙 지배에 항거하면서 명나라의 재건을 도모하던 정성공(鄭成功)이 1662년 네덜란드 잔류 세력을 축출하고 안평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였다.


3. 타이완의 반(反)청 항쟁기(1662년~1683년)

정성공(鄭成功)과 그의 아들 정경(鄭經)은 유교 교육을 실시하고 중국식 법제를 시행하는 등 타이완(臺灣)에 중국식 관습과 문화를 이식하였다. 한편, 정청공과 정경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대륙과 마주보는 해안에 성벽을 건설하는 등 청(淸)나라에 대항하였다. 이 기간 중에도 청나라의 압제를 피하여 타이완으로 이주하는 중국인들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682년 정경이 사망하고 12세의 어린 아들이 그의 뒤를 승계하자 청나라는 1683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타이완을 점령하였다.


4. 타이완의 청나라 왕조 통치 시기(1683년~1895년)

청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타이완(臺灣)에서는 쌀, 대나무 및 장뇌(樟腦) 농업이 집중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륙으로부터 많은 본토인들이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환금성이 높은 장뇌 채취에 종사하였다. 타이완의 농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19세기에는 영국, 미국, 프러시아(Prussia) 및 일본 등 당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1858년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한 후 안핑(安平)과 지룽(基隆) 등 타이완의 4개 항구를 외국에 개방하였다. 이후에도 제국주의 열강은 타이완의 주요 지역을 공략하고 거점화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청나라는 제국주의 열강이 타이완에 대한 침탈을 계속해오자 타이완에 대해 계속적인 개발과 방어를 도모하였고 1822년 타이완을 청나라의 22번째 성(省)으로 편입시켰다. 청으로부터 파견된 ‘리우밍촨(劉銘傳)’은 타이완의 지방행정 조직을 체계화하고, 교통·우편·통신망을 정비하는 등 타이완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895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맺어짐에 따라 청나라는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였다. 타이완 주재 청나라 관리들과 타이완의 토착세력들은 일본에 대한 타이완 할양에 반대하였고 1895년 5월 25일 타이완의 독립과 타이완민주국(臺灣民主國)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5년 10월 21일 일본은 타이완의 독립 움직임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5. 타이완의 일본 식민시기(1895년~1945년)

일본은 타이완(臺灣)에 대해 50년 동안 식민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이 기간 동안 타이완을 일본 본토에 대한 식량 공급기지 및 일본 공산품의 소비기지화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초기, 중기, 말기로 나뉘는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했던 형식과 거의 흡사하다.


6. 타이완의 1945년 이후 역사

(1)중국국민당의 타이완 이주기

중국국민당(KMT)1)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타이완(臺灣)을 연합국에 양도한 후 국부군(國府軍)을 타이완에 파견하여 인수 작업을 실시하였다. 타이완 거주민들은 초기에는 국부군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국부군이 부패하고 타이완 거주민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들에 대해 점차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2월 28일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본토인들과 타이완인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49년 5월 중국국민당은 공산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타이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30만 명의 국부군을 타이완에 진주(進駐)시켰다. 그리고 중국국민당은 1949년 10월 광둥(廣東) 등지에서의 대규모 접전에서 공산군에게 패배한 이후 12월 7일 타이완으로 ‘중화민국’정부를 이전하였다.

(2) 중국국민당의 타이완 정착기

타이완으로 이주한 장제스(蔣介石)의 중국국민당(KMT) 정부는 토지개혁 및 연속적인 4개년 계획 등 타이완 경제 부흥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정책은 제한적인 국내수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고도의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이었다. 그리하여 타이완은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연평균 9.3%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타이완은 1970년대에도 고도경제성장을 계속해서 이루어갔으나 외교적으로는 고립화의 추세가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으로부터 축출되었고, 미국 및 일본과 단교하였다. 1970년대 이후 타이완에는 국내정치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1975년 4월 장제스 총통이 사망하고, 후임으로 옌자간(嚴家淦) 총통이 취임하였다. 1978년 3월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취임하였다. 1988년 1월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며, 장징궈 총통이 사망하고,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취임하였다.



대만과 중국, 양안(兩岸) 관계

양안(兩岸)은 중국의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중화민국(대만)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중화민국이 국공 내전에서 패한 뒤 정부를 타이베이 시로 옮긴 이후 타이완의 정치적 지위 및 주권 귀속에 관한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 역사, 문화, 외교 등 각 방면의 문제를 가리킨다. 양안문제(兩岸問題) 라고도 한다.


1. 1949년(중국, 대만 건국)~1978년(중국, 개혁개방 노선채택): 갈등과 대립의 시기

대만은 ‘삼민주의 통일중국’(三民主義 統一中國)을 내세우면서 본토의 공산당 정부에 대해 ‘삼불(三不)정책’(접촉하지 않고, 협상하지 않으며, 대화하지 않는다.)을 견지하면서 공산주의와 무력사용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중국은 무력에 의한 대만통일을 주장했다.


2. 1978년(중국의 개혁개방노선을 채택): 교류와 협력을 모색하는 시기

중국은 그간의 무력 해방정책을 ‘평화통일’노선으로 변경하고 𔃳통(三通)’(통상(通商), 통항(通航), 통우(通郵)) 및 4류(四流)(경제, 문화, 체육 및 과학기술 교류)를 제의하였다. 또한, 대만의 자본주의 및 군대유지 등에 대한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은 평화통일 9개 방안 및 일국양제(一國兩制)에 의한 통일방식(1982.12)을 제안하였다. 대만도 1985년 ‘대륙교역삼원칙’을 마련하여 중국과의 간접무역을 인정하였고, 1987년에는 친척 방문 등 인적교류를 통한 다각적인 양안 교류를 추진하였다. 또한, 서로간의 무역, 투자 , 장기적 안정유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양안경제무역교류촉진5원칙’을 제시하였다. 이에 중국도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중국과 대만 간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정당 및 단체 간 회담 개최, 대만에 대한 무력사용 불 포기는 대만 동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외세에 대한 것이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장8점(江八點)’을 제안하였다.


3. 대만 총통의 정책에 따라 악화-개선의 관계가 반복되는 상황

(1) 리덩후이 총통: 대만의 주인의식과 국가정체성을 강조하는 리덩후이 총통의 취임한 후로는 양안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1995년 중국이 대만해협에서 군사훈련 중 미사일을 발사하고, 1996년 리덩후이 총통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여기에 1999년 리덩후이 총통이 양안관계를 특수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보는 ‘양국론(兩國論)’을 제기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은 타이완의 공식국호를 변경하여 중국을 자극하는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중요한 서약을 했다.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도 평화발전을 위한 4가지 지침을 발표하며 양안관계에 대해 보다 유연한 입장을 취하면서 중국과 대만, 양안은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교류를 지속해 나갔다. (3)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집권(2008. 5월)하면서 양안관계는 크게 개선되기 시작한다. 마잉주 총통이 불독립, 불통일, 무력불사용을 내용으로 하는 3불(三不)정책을 제시하면서 양안 간에는 정상회담도 수차례에 걸쳐 열렸다. 특히,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고립정책을 취해왔던 중국이 2008년 5월 세계보건총회에 대만의 옵서버 자격 참가를 인정함으로써 외교 분야에서도 양국의 협력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2012년 마 총통 재집권으로 양안관계는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계속 긴밀해지고 있으며, 군사 분야나 안보분야에서도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남중국해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문제에 있어서는 각자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도 타국에 대해서는 공동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은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고, 홍콩과 마카오처럼 중국의 관할구라는 점을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만의 언어

타이완의 공용어는 중국 표준어인 만다린(Mandarin)이다. 대만에서는 만다린을 보통화(普通話)또는 국어(國語)라고 부른다. 이 밖에 민난어(閩南語)라고 부르는 타이완 방언이 있는데, 민(閩)은 복건(福建)을 간략히 일컫는 말이다. 또한 객가어(客家語)라 부르는 중국 남방지역의 방언도 있다. 대만의 보통화는 구어는 중국 본토의 언어와 몇 개의 어휘, 성조 사용이 다소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른 점이 없다. 글씨를 쓸 때는 번체를 사용한다는 점이 다르고, 중국 본토에서는 알파벳을 이용한 병음을 사용하는데, 대만에서는 주음부호를 사용한다.


대만에서 꼭 가야하는 명소, Top7

1. 세계 5대 박물관, 국립고궁박물원

1965년 개관한 국립고궁박물원은 런던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박물관과 함께 세계5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옛 궁전을 뜻하는 고궁이란 말처럼 이곳에는 대대로 중국 황실에서 전해 내려온 진귀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원래 이 유물들은 명·청 왕조의 황궁이었던 자금성 안에 소속되었던 것들이다. 이 유물들이 대만으로 공간이동을 한 과정에는 중국 근대사의 굴곡이 얽혀있다. 1933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유물들의 도난과 국외유출을 우려한 국민당이 자금성에 있던 것을 난징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옮기게 된다. 이후에도 충칭重慶, 쿤밍昆明, 러산樂山을 거쳐 마지막에는 쓰촨성의 난시南溪로 옮겨졌다. 전란 중에도 중앙박물관 준비처는 역사 유적지 곳곳에서 고찰과 발굴 작업을 벌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곳곳에 분산되어 있던 고궁박물원 유물과 중앙박물관 유물을 모두 모두 충칭으로 집중시킨 다음 다시 난징으로 운반하였다. 1948년 가을, 국공내전의 형세가 역전되자 장제스는 핵심 유물을 선정해서 타이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여 베이징에 있던 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관에서 옮겨온 핵심 유물들을 합하면 총 608,985점에 달하여 수량만으로도 방대한 규모의 중화민족 문화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항일전쟁은 물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중에도 장제스 군대는 당시 이 유물들을 각별하게 보호해 유물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대만까지 옮겨진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2. 영험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용산사龍山寺

약 260년의 역사를 가진, 타이완에서 가장 오래된 전형적인 사원이다. 특이하게 불교와 도교가 공존하는 사원이다. 이 사원은 중국 남방 식과 타이완 전통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타이완의 수많은 사원들 가운데 용산사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관세음보살상’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폭격기가 총통부로 착각하고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놀랍게도 돌기둥만 파괴되고 보살상은 손끝 하나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장개석을 기념하는 국립중정기념당(國立中正紀念堂)

타이완을 대표하는 가장 인상적인 기념물로 꼽힌다. 1975년, 장개석 총통이 서거하자 타이완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화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당을 건립한 것이다. 중정은 장개석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패한 뒤, 1949년 대만으로 건너온 장개석은 대만 국민들로부터 훌륭한 지도자라는 평가와 군사통치 체제를 수립한 독재자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기념당에는 장개석의 일생과 업적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4.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가 있는 타이베이101타워

총 508M 높이의 타이베이101빌딩은 타이완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조원이 설계한 것으로 땅에서 솟아오른 죽순 같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 한자 팔八자를 거꾸로 층층이 올린 것 같기도 하다. 8층씩 묶어 총 8단으로 올려 졌는데, 중화권에서 숫자 8은 성장, 번영, 발전 등을 의미하는 한자 발(發fa)자와 발음이 비슷하여 길함을 뜻하는 숫자로 통하기 때문이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비용이 NTD400달러로 싼 편은 아니지만, 기네스 기록을 세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분속 1,010M로 5층 매표소에서 89층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올라가 대만 시내의 야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대만의 첨단 기술을 느낄 수 있다.

5. 파도와 바람이 빚은 지질공원, 예류野柳

‘야생 버드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지질공원, 예류에는 바람과 파도에 의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산호 조각물들이 있다. 오랜 침식, 풍화 작용이 반복되면서 제멋대로 해안에 흩어져 있는 기암괴석들을 보는 순간 자연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지질공원에는 줄을 서야지만 사진을 함께 찍을 수 있는 여왕바위(女王頭)가 있다. 이 바위는 고대 이집트 신왕조 시대의 왕비 중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네페르티티 여왕이 왕관을 쓰고 있는 옆모습과 영락없이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의 위대함과 인기스타 여왕바위를 느껴보고 싶다면 예류를 찾아도 좋다.

6. 여유롭고도 쓸쓸한 항구도시, 단수이淡水

타이베이에서 MRT를 타고 단수이 역에 내리면 바다 혹은 강물에서 나는 향을 맡을 수 있다. 일찍이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상륙했던 곳이다. 요새화되기 좋은 지형적인 조건으로 침략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던 땅이었다. 또한, 높은 절벽에 오르면 태평양까지 바라볼 수 있는 입지적 조건하에서 중국인들을 비롯한 많은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자연스레 해외무역이 번성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홍콩과 동남아시아 및 미국을 잇는 중요한 무역 거점 역할을 하였고, 풍요로운 어족으로 어업이 매우 발달했던 도시다. 현재는 항구의 역할을 하지 않지만, 역사적 매력이 많아 꾸준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도시이다. 단수이에는 17세기 스페인과 네덜란드, 영국인들에게 점령당했던 것을 느낄 수 있는 홍마오청이 있다. 스페인인들에 의해 건축되고, 네덜란드, 영국인들에게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인 만큼 이국적인 느낌을 느낄 수 있다.

7. 좁은 골목의 아련한 향기를 품은 지우펀九分

가파른 골목과 계단의 도시 지우펀은 타이완의 유명한 영화<비정성시>의 일부가 촬영되면서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다. 조용한 산골마을이었던 지우펀은 1920~30년대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순식간에 골드 러쉬를 이루게 되었다. 기회의 땅을 찾아 온 타지인들이 정착하면서 찻집과 많은 공연장들이 생겨 한때는 작은 상하이(小上海)로 불리기도 했다. 지우펀의 골목골목에는 당시 지어진 목조건물들이 처마를 맞대고 줄지어 있고, 많은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며 찻집 골목으로 변모하였다. 밤이 되면 멀리 푸른 바다와 야경, 산의 경사면을 따라 홍등이 붉게 켜진 골목길은 옛날의 부귀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지우펀의 아름다운 광경에서 관광객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아련함에 빠지게 된다.


대만의 매력 포인트

1. 야시장

곳곳마다 매일 밤 열리는 대만의 야시장은 대만의 독특한 밤 문화로 관광객들의 인기를 끄는 장소로 꼽힌다. 가장 유명한 곳은 스린야시장(士林夜市)이다. 다른 야시장과 달리 먹거리 구역과 쇼핑 구역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타이베이의 젊은이들과 대만을 찾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다양한 길거리 음식을 먹고, 또 의류, 신발, 액세서리 등 다양한 아이템을 쇼핑하는 야시장에서 대만의 활기찬 밤문화를 느낄 수 있다. ※추천음식: 雞排,臭豆腐,粉圓,都花,冰菓,仙草奶茶 등 

2. 스탬프 여행

작고 사소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세심한 배려를 갖춘 아이템들이 있어 은근히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대만의 명소와 유명 관광지에 준비되어 있는 기념 스탬프입니다. 처음에는 '별걸 다…' 하는 생각도 하겠지만, 가는 장소마다 스탬프를 하나씩 수첩이나 종이에 찍다보면 대만에서 갔던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나중에 그 도장을 보면서 대만에서 차곡차곡 쌓은 추억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3. 드라마, 영화의 촬영지를 찾아라.

작은 섬나라이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대만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F4로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남자'의 드라마 원작, '말할 수 없는 비밀'(단수이), 한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대만 드라마 '장난스런 키스'(비탄), 최근 대만 판 건축학개론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던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등 다양한 대만의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를 찾으면서 대만을 여행한다면 한층 더 재밌는 추억을 만들 수 있습니다.

4. 친절한 타이완: 人情味

대만에는 정말 따뜻하고 친절한 배려가 넘치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외국인들을 피하지 않고 따뜻한 호의를 베푸는 대만 사람들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대만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대만의 매력은 맛있는 음식과 멋진 자연 경관보다도 바로 '人情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