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
동도(東都)는 수 양제에 의해 천도되어 수나라의 두 번째 수도가 된 곳으로 지금의 낙양을 말한다. 605년부터 수가 멸망한 619년까지 수나라의 수도로서 기능했다.
동도의 건설목적
부친인 수 문제(文帝)가 수도로 삼은 대흥(장안)은 국토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아 불편함을 초래했다. 나라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수도가 하나 더 필요했다. 또한 수나라 이전의 수 백 년에 걸친 분열의 시기동안 북방세력의 남하도 잦아져 수도 장안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토의 모든 정치적 혹은 군사적 역량을 한 곳으로 귀속시켜야 할 필요성과 북방세력을 제압해 더 이상 북방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경제적으로도 농토가 황폐화되어 정착된 농업인구가 적었고 기술력의 발전도 없었다. 특히 장안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수리시설의 파괴도 심각했다. 이로 인해 관중지역의 농업생산력이 크게 후퇴하였고 수도 장안이 가진 경제적 지위는 상실되었다. 《수서•식화지》에서는 당시의 수도 장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인구는 매년 늘어만 가는데, 땅은 좁고 사람은 많으니, 의복과 양식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였다.(天下户口岁增,京辅及三河,地少人众,衣食不给)"
수 양제는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에서 장안에서 동도로의 천도를 결정하고 동도의 건설을 실시하였다.
동도의 건설과정
양제는 즉위하던 해인 대업 원년(605년) 장안에서 낙양(동도)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동도 건설이라는 대규모 사업이 당시의 유명한 기술자 우문개(宇文愷)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다. 이 해 3월에 공사에 착수하여 다음해 1월에 완공되었는데 그 사이 매월 약 2백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농민들은 고향을 멀리 떠나 낙수의 양안(兩岸)에서 동도의 건설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려야 했다.
대규모의 웅대한 궁전을 짓기 위해 멀리 장강 이남의 좋은 목재를 벌채하여 이를 운반해 왔다. 한 개의 목재를 운반하는 데 2천여 명의 인부가 필요하였다 하니 난공사 중의 난공사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낙양성의 웅대하고 화려한 궁전을 더욱 화사하게 꾸미기 위하여 조경 공사도 이루어졌다. 장강에서 오령(五嶺)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산재해 있는 진기한 나무와 돌, 기화 요초, 진조 기수(珍鳥奇獸) 등이 모두 수집되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이 궁전의 유적은 현재 하남성 낙양시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고고학자의 실지조사에 의해 외성(外城)의 둘레가 20여km에 이른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성문과 상수도의 흔적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한다.
참고문헌
김희영,『이야기중국사 2』(청아출판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