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목차
개요
후한의 건국
유현은 유수형제의 공을 질시하여 유연을 죽이고 도읍을 낙양으로, 다시 장안으로 옮기고 유수를 하북으로 보냈다. 결국 유수가 그 곳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 서기 25년에 호(鄗)에서 제위에 올랐다. 이 때 적미병이 장안으로 들어가 유현을 죽이자 유수는 적미병을 토벌하고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다. 이 나라를 후한이라 부르며, 왕망의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한나라 황실의 후예인 유수가 바로 후한의 광무제이다.
후한의 중흥기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한 이래 명·장제 때에 이르러서도 광무제의 가르침을 그대로 답습하여, 유학을 중시하고 관리를 다스리는 데 주의하였다. 또한 외척을 억제하고 밖으로 흉노를 물리쳐 서역에까지 한의 위세를 떨쳤는데, 이 시기를 전한의 문·경제와 비유하여 ‘명장지치’라고 부른다. 특히 장제는 관대한 정책을 통해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농상을 장려하고 특별히 찰거(察擧) 제도를 중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형벌과 요역도 감면하였다. 또한 명·장제 시대에 두고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반초가 서역을 경영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후한의 쇠망
189년에 영제가 사망한 후에 후한은 다시 환관과 외척 사이의 정쟁이 재개되었다. 외척인 하진은 일류 명족이었던 원소와 강족의 반란을 성공리에 진압한 군벌 동탁과 협력해 환관을 타도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하진은 살해되었고, 원소는 환관세력을 일소했다. 이를 기점으로 해 각지의 군웅이 일어나 패권을 다투는 새로운 정치상황이 등장했다. 원소와 동탁, 조조와 손견 등이 여타의 호족과 결합하면서 세력을 넓혀 군벌로서 전국을 분할했다. 한의 황제는 이미 군벌에 대항할 힘이 없었고, 명목상의 황제일 뿐이었다. 동탁에 의해 옹립된 헌제는 동탁을 따라서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겼다. 동탁이 부하에게 피살되자, 다시 낙양으로 돌아온 헌제는 이후 조조에게 의지했다. 조조는 200년에 관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 화베이를 통일하여 위왕이 되었다. 220년에는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황제의 위를 이어받아 광무제 이후 14대, 196년에 걸쳐 존속하던 후한은 멸망했다.
통치체제
군국제
광무제는 후한 건국 이후 공신들을 제후(諸侯)와 열후(列侯)에 봉하고 그 외의 지역을 郡縣으로 삼아 직접 통치하는 전한대의 군국제도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전한대 공신들의 권력이 얼마나 황제 권력에 위협이 되는 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광무제는 제후(諸侯)와 열후(列侯)의 봉지를 전한대의 그것보다 훨씬 작게 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
중앙의 정치제도
전한 시기의 중앙 관제를 모방해 三公제도를 실행했다. 삼공에는 대사도(大司徒), 대사공(大司空), 대사마(大司馬)가 있다. 전한대에는 삼공 중 승상(丞相)이 국가 일반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정무를 대게 단독으로 행하였으나 후한 대에는 황제가 일이 있으면 삼공 모두에게 상의하였고, 삼공도 상주(上奏)할 일이 있으면 단독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시기에는 중요한 결정을 삼공이 아니라 황제의 비서격인 상서대(尙書臺)에 맡겼다. 상서대의 기능과 역할은 점점 커져 후한시대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또 九卿중 少府는 원래 전한대에 치속내사와 함께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나 후한 대에는 황실에 봉사하는 기관으로 변화하였다.
지방의 정치제도
지방의 정치제도는 대체로 전한의 그것을 따랐다. 다만 전한시대 400여개에 달하던 현(縣)을 작은 현(縣)을 합병해 대폭 줄였다. 또 자사의 권한을 강화해 지방 행정을 엄격히 감독함으로써 황제 권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외교
흉노와의 외교정책
후한 건국 초기 흉노는 후한의 북방을 침입하고 세력을 키워 서역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후한은 건국 초기 사회 안정에 힘을 써야 했기에 흉노에 대해 소극책을 펼침으로써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흉노 내부의 분란으로 일부가 한에 투항해오면서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광무제 建武23년 남흉노는 후한 제국과 연합해 북흉노와 대립하였다. 이에 북흉노는 후한에 화친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되었다. 효명제시기에 북흉노가 후한의 북방을 침탈하고 또다시 화친을 제의하였다. 후한은 북흉노와의 화친을 받아들였는데, 이런 상황에 위기를 느낀 남흉노가 도리어 후한을 배반하고 북흉노와 손을 잡고자 하였다. 이에 후한은 오르도스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켜 남 북 흉노간의 교류를 저지하였다. 그 후로도 북흉노의 침략이 계속되어 후한은 남흉노와 결속하여 대처하였다.[1]
서역 경영
장건으로부터 서역의 사정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면서, 무제는 서역 지배에 욕심을 냈다. 특히,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북흉노와 후한은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투었다, B.C.108년에 무제는 표기장군 이광리를 보내 대완국을 정벌하였고, 대완국이 한에 투항해 오자 그 밖의 서역의 각국도 한에 조공을 바쳤다.
B.C.119년에는 오손과 연합하여 흉노를 치고자 장건을 재차 서역에 파견하였고, 장건은 오손에서 다시 부사를 대원, 강거, 대월지, 대하 등에 파견하여 이 지역 국가들과 정식으로 교통했다. 이후 무제는 해마다 사신을 이들 국가에 파견하였고, 이들도 한에 사신을 보내왔다.
그런데 왕망 때 중국의 국력이 약화되면서 이 기회를 틈타 흉노는 다시 서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후한의 성립 이후에 정부는 왕망시대에 실추된 주변 민족에 대한 권위를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한이 다시 서역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73년 북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장군 두고가 서역 제국의 설득을 위해 부하인 반초를 파견한 데서 비롯되었다.
반초는 왕망정권 이후 60년 만에 부활된 서역도호로서 30년간 서역 땅에서 지내며 동서 교통로의 재확보에 주력했다. 그 사이 대월지의 침입을 저지했고, 파미르고원 동서의 50여 개국을 한에 조공국으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반초 이후 강족의 침입과 반란에 시달리면서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후퇴했다.
사회
사대부 계층의 성장
後漢대에는 유가가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 자리 잡았다. 이 시대 관료는 유가적 덕목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사대부가 관직으로 진출하는 통로인 선거(選擧)에서도 유학의 예와 덕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하는 효렴(孝廉) 과목이 중시되었다. 자연스레 유가를 공부한 사대부 계층이 선거(選擧)를 통해 관계 진출이 증가했고, 이들은 황제 권력과 별개로 자신들의 권력을 형성해나갔다.
후한대의 호족 그리고 외척과 환관의 대립
후한이 성립되자 호족은 세력을 더욱 넓혔다. 그들은 토지문제에 대한 중앙정부의 무관심을 틈타 토지를 계속 겸병했다. 이와 함께 호족은 종족과 향당사회를 토대로 관리로 선발되어 중앙과 지방의 정계로 진출했다.
관리가 되는 방법에는 지방관리의 추천을 받거나 시험에 급제하는 방법이 있다. 또 직접 향리에서 관리 후보자를 추천하는 방법도 있는데, 호족의 자제나 유력호족의 일원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상호 통혼 등을 통해 지역을 초월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을 키워나갔다.
호족이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해 점차 중앙의 정계에 등장한 데 반해, 황제의 측근에서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환관은 외척보다 황제의 권력이 더 클 경우, 외척을 억제하기 위해 이용하는 세력이다.
후한 후반기는 외척과 환관의 정쟁과 전횡으로 황제권이 쇠락해 갔다.
후한 말에 환관세력의 전횡과 매관매직 등의 부패상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 일었다. 지방호족과 사인도 이러한 환관세력의 부정부패를 비판했다. 정의파 지식인들은 환관과 결탁한 세력을 탁류라 부르고 자신들을 청류라 불러 구분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했으며,
이들의 정치적 대립은 당고사건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2차에 걸친 탄압은 청류파운동을 재기불능의 상황까지 위축시켰고, 결국 청류파운동이 실패한 후 후한왕조와 지식인층 사이의 괴리감은 심화되었다.
황건의 난
호족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처한 농민은 외척이나 환관의 정부하에서 과중한 부역의 부담에도 시달렸다. 후한 중기 이후부터는 대규모 재해가 잇달아, 농민은 기근에 시달렸다.
게다가 북방에서 이민족의 침입을 방비하는 군사조직이 허술해져 강족, 흉노, 선비 등이 자주 침략했다.
이러한 악조건의 상황 속에서 농민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장각은 신흥종교 ‘태평도’를 창설하여 10만 명에 이르는 농민 신자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황건의 난이다.
후한정부는 이 반란에 직면해 권력투쟁을 일시 중시하고 당고되었던 사인들을 석방해 황건군의 진압에 나서도록 했다. 이후 장각이 병사하면서 주력군은 1년도 채 못 가서 궤멸되었지만, 각 지방에서의 반란군은 여전히 강력해 농민의 봉기는 20년 이상이나 이어졌고, 황건의 난에 의해 한제국의 지배는 대타격을 받았다.
문화
과학문명의 발전
후한대에는 과학기술 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후한의 장형은 혼천의를 제작했는데, 혼천의는 모든 항성이 천구상에 있고, 일월오성도 천구상을 운행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장치이다. 동력을 이용해 밀실 안에 있는 누각의 물을 하루에 1회 자동으로 회전시켜 하늘의 상태와 부합하도록 만든 자동식 천구의이다.
장형은 관측을 거듭해 월식의 원리와 달빛이 태양의 반사광임을 밝혀냈고, 지동의라는 지진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지동의는 나무통 모양을 한 기구의 8면에 용머리를 매달아 지진이 나면 진원지 방향의 용의 입에서 동구슬이 그 아래의 개구리의 입으로 떨어져 들어가도록 설계되었으며, 지진의 강도도 측정이 가능했다.
후한의 채륜이라는 농민 출신의 환관은 현재 쓰이는 종이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중국에서는 처음에 동물의 뼈나 청동기에 문자를 새긴 기록이 있었는데, 그후에 목간이나 죽간, 그리고 베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모두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채륜은 기록을 써서 남기기 위한 재료를 만들어내려고 연구를 거듭하여 나무껍질, 마 부스러기, 어망을 재료로 하는 종이의 제조에 성공하였다.
채륜의 제지법은 한국과 일본에 곧 전파되었으며, 당대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라비아로, 그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후한 말기에 장중경은 열병학설을 발전시켜 상한론을 지었다. 그는 이 책에서 증상에 따른 치료법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한방의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후한 말의 화타는 마비신이라는 일종의 마취제를 사용한 외과수술에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한방의학의 기초가 후한대에 이미 확립되었다.
세부 역사
1.광무제 유수
2.효명제 유장
3.효장제 유달
4.효화제 유조
5.효상제 유융
6.효안제 유호
7.북향후 유의
8.효순제 유보
9.효충제 유병
10.효질제 유찬
11.효환제 유지
12.효령제 유굉
13.홍농왕 유변
14.효헌제 유협
참고문헌
신승하,『중국사』,대한교과서,2005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중앙M&B, 2001
- ↑ 이춘식 지음, 『중국 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1989, p259~p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