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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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匈奴)의 등장

흉노는 몽골고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북아시아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이다. 전국시대의 중국인은 흉노를 호(胡)라 총칭하였고 흉노보다 동쪽의 민족을 동호(東胡), 서쪽의 민족을 임호(林胡)라 부르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인은 북방의 이민족을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흉노의 동서에 있던 민족을 각각 동호와 임호라 칭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흉노와 그 외의 북방 이민족들을 서로 다른 종족으로 인식하였다.

전국시대 중기인 기원전 318년, 한·위·조·연·제의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을 공격했는데, 이때 흉노는 5개국 측에 호응하여 진과 싸웠다. 이 전쟁은 5개국 측의 참패로 끝났는데 흉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민족이 처음 기록상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흉노는 비록 패주하여 북으로 옮겨갔다고 전해지나 그 무렵부터 흉노의 이름이 중국 사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흉노의 이름은 중국 최고의 지리서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 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흉노인에 대한 기록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강가에서 발견되었던 켄콜 분묘군은 흉노의 것으로 추정되는 분묘이다. 이 분묘군은 193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서 구소련의 고고학자 베른스탐에 의해 발굴·조사되었고, 지하식 횡혈묘(橫穴墓)로부터 합장되었던 남녀 2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그 땅에서 기원전 1세기에는 질지(郅支) 선우가 다스렸던 서흉노 일파가 정착하고 있었고, 기원후 1~2세기에는 북흉노의 일파가 정착하고 있었는데 켄콜 분묘군은 그중에서도 북흉노 일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른스탐의 연구와 켄콜 분묘에서 출토된 남자의 인골에 관한 연구에 의해 켄콜인의 가늘고 길게 뻗은 코뼈, 배 모양의 콧구멍, 낮은 코, 높고 둥근 눈구멍 등의 외면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외면적 특징을 근거로 한대의 흉노인의 원류를 몽골로이드계로 보고 있다.

흉노와 진시황

기원전 221년 진 왕정은 6국 중 최후에 남았던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을 통일하였다. 그 무렵 북방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는데, 흉노의 초대 선우인 두만(頭曼)이 출현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였다. 그리고 두만은 오르도스 지대에 진출하여 남쪽의 진에 대항하였다.
기원전 215년에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병사를 주어 북쪽의 흉노를 치게 했다. 그 결과 진은 그때까지 흉노에 의해 점거되어 있던 오르도스 지역을 탈취하고 황하 유역에 4개의 현성을 쌓아서 둔전병을 설치했다.
그리고 진시황제는 북방 유목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래의 연, 조, 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이로 인해 흉노는 내몽골에서 쫓겨나고 외몽골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흉노 유목국가의 발전과 분열

기원전 3세기의 북아시아 정세

기원전 3세기경, 몽골고원의 흉노를 중심으로 동쪽은 동호, 서쪽은 월지의 세력이 강성했다.
동호는 현재 중국의 길림, 흑룡강성 주변에서 세력을 펼치고 있던 유목수렵민족었다. 서쪽의 월지는 화서회랑에서 감숙지구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갖고 있던 유목민으로 실크로드의 요충을 차지하여 당시 가장 강성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북쪽의 몽골에서부터 바이칼호 남변에 걸쳐서는 정령족이 있었다. 그들 역시 수렵유목민으로 늘 북방으로부터 흉노를 위협하고 있었다. 예니세이 강의 상류 지역에서 셀렝게 강에 걸쳐서는 격곤, 혼유, 굴사, 신리 등 여러 민족이 분포하고 있었다.
내몽골에서 오르도스 지대에 걸쳐서는 반농반목 민족인 누번과 백양이 있고 화서회랑을 넘어서 청해지구에는 티벳계 민족인 저와 강이 분포하고 있었다. 감숙에서 북서쪽으로는 호게, 오손 등 각 민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흉노의 세력 확장

아버지 두만을 살해하고 선우의 자리에 오른 묵특에게 흉노의 동방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던 동호가 시비를 걸어왔다. 동호 왕은 묵특에게 흉노와의 사이에 있던 구탈지의 할양을 요구했고 이에 노한 묵특은 전군에 호령하여 동호를 무찌르고 왕을 살해한 뒤 백성과 가축들을 빼앗았다. 그 후 묵특은 동호를 토멸한 힘에 편승하여 서방의 월지를 패주시키고, 진나라의 혼란을 틈타 오르도스 지역에 침입하여 그곳에 있던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고 나아가 한나라의 영토에 있는 연과 대의 땅을 침입했다.
묵특이 북아시아 전토를 병합할 무렵, 유방 고조가 중국 전토를 통일하였고 기원전 202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조는 흉노에 대비하기 위해 맹장 한왕 신을 대의 땅 지마읍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평소 흉노를 두려워하던 한왕 신은 고조의 흉노 토벌 명령을 어기고 화평의 길을 택했고, 결국 부장 왕황 등과 함께 흉노에 투항했다. 한왕 신의 투항으로, 마읍과 태원을 공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묵특은 한왕 신의 군사 지원을 얻어 40만 대군을 일으켰다.
고조의 부대는 묵특의 전략에 걸려 고립되어 백등산에서 7일 동안 굶주림으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평성의 치’라고 부른다. 동호를 멸하고 한을 물리친 흉노는 기원전 176년에 월지를 토벌함으로써 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묵특에 의한 월지 토벌은 월지족을 남북으로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묵특의 아들 노상 선우는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이동한 월지의 주력부대를 추격하여 토벌하였다. 묵특과 노상의 2대에 걸친 월지 토벌에 의해 흉노는 ‘국가’발전을 위한 기초가 세워지게 되었다.

흉노의 동서분열

호한야 선우와 그의 형 질지 선우가 서로 대립하면 동서분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4년 질지는 서방의 윤진 선우를 쳐서 그의 병력을 규합하고 호한야를 패주시켜 선우 정을 장악했다. 패한 호한야는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들 우현왕을 한의 조정에 입시케 하고 한나라의 원조를 구했다.
기원전 51년 정월, 한나라에 워조를 구하고자 감천궁에서 호한야는 한의 선제를 배알했다. 호한야의 입조는 160년 이상 계속되었던 흉노와 중국 왕조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한나라로서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이후로 한과 호한야의 관계는 점점 더 긴밀하게 되어 기원전 49년, 기원전 33년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호한야는 한의 조정에 입조하였다. 호한야의 라이벌이었던 질지도 한나라 조정에 사절을 파견하고 있었지만, 호한야와는 다르게 한과의 대등한 관계를 원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나라의 조정은 신하의 예를 갖춘 호한야를 지원했고, 한을 둘러싼 호한야와의 외교전쟁에서 패한 질지는 서방 경략에 전념하여 그가 이끄는 한 무리는 서흉노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과 서흉노는 여러 번 충돌이 발생하였고, 기워전 36년 한은 서역도호 감연수와 부교위 진탕에게 군사를 주어 강거 땅에서 질지를 살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질지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그의 죽음은 서방 제국에 흉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흉노와 신나라의 대립

선제와 호한야 선우에 의해 맺어졌던 한과 흉노 사이의 우호관계는 불과 60년이 채 못 되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한의 정권을 찬탈했던 왕망의 대흉노 강경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왕망은 동북 방면의 오환을 선동하여 흉노에 피포로 내는 세금의 공납을 거부케 하였다. 또한 그때까지 한이 채택했던 흉노에 대한 특별대우를 폐지하여 객신에서 외신으로 격하시키고, 마침내는 흉노의 땅을 새로운 하나의 주로 편입하는 강격책을 채용하였다. 그리고 장안에 인질로 억류한 선우의 아들들을 참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왕망의 대흉노 강경책은 흉노를 몹시 자극하여 흉노는 매년 중국의 북변을 침략함으로써 보복하였다.
왕망은 20만 대군을 일으켜 흉노를 치려고 하였으나 그 계획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신 왕조의 멸망을 닾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왕망에 의한 이와 같은 고압 정책은 흉노뿐만이 아니라 주변 이민족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때 흉노에 반기를 들었던 오환과 선비도 중국으로부터 등을 돌려 흉노의 진영에 항복했다.
서역 제국들도 흉노에 복종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재물을 공납하였다. 이렇듯 서역 제국의 복속은 흉노의 경제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23년, 왕망이 전사하자 흉노의 세력은 점차 강대해져서 호도이시도고약제 선우 시기에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흉노의 남북분열

기원후 45년경부터 몽골고원을 덮쳤던 가뭄과 황해 및 동방의 예속 종족 오환의 봉기는 흉노정권의 뿌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선우 호도이시도고의 사망에 따른 선우 자리 계승전으로 인해 흉노는 더욱 쇠퇴하기시작했다. 재위 중 선우 호도이시도고는 자신의 아들에게 선우 자리를 계승시키기 위해 동생 이도지아사를 주살했고, 이에 따라 선우의 자리는 맏아들 오달제후에 의해 계승되었다. 바로 그해에 오달제후가 죽자 그의 동생인 좌현왕 포노가 즉위하여 선우의 자리는 호도이시도고의 혈통에 의해서 독점되었다.
호도이시도고 선우 일족의 혈통에 따른 선우 자리 독점에 대해서 일축왕 비는 반대하였다. 비는 호도이시도고 선우의 조카로 당시 우욱건 일축왕으로서 흉노 남부지구와 오환의 통치를 맡고 있었다. 비는 새 선우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고 선우 정의 집회에도 참가하지않았다.
비의 모반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골도후들은 비를 토벌할 것을 선우게 진언했다. 그런데 선우의 궁려에서 몰래 이 말을 들은 비의 동생 점장왕이 이 정보를 비에게 전하였고, 정보를 얻은 비는 48년 봄, 8부의 대인들과 협의한 후 자립하여 스스로 호한야 선우라 칭했다. 그가 호한야 선우라고 이름 붙였던 것은 조부의 칭호를 계승한 것으로, 한나라의 힘을 빌려 포노 선우와 대결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서 흉노는 오늘날 내몽골지구와 화북의 일부에 거주하는 남흉노와, 외몽골에서 패권을 잡은 북흉노로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사와다 이사오, 『 흉노』, 아이필드,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