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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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출생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湖南省) 샹탄현 사오산 구
사망 1976년 9월 9일
생존시기 청나라 ~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작품 모순론, 신민주주의론 등
관련 활동 정치, 문학,

요약

1893년 12월 26일 호남성의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368일간의 대장정을 겪고 그 이후 중국 공산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건국 이후 초기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중국 나름의 토지개혁 등을 시행하였고, 1953년부터는 아예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추수하여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1956~1958년 무렵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를 두고 벌어진 노선 대립 및 당시의 국제적 관계 상의 이유(중소 분쟁)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약 3년간은 소련식 모델이 아니라 중국 독자적으로 대약진운동을 일으켰고, 1966년 문화대혁명의 촉발 시기에는 대중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열기를 부추기고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다. 10년 뒤인 1976년 9월 9일 사망했다. 모순론실천론을 근간으로 신민주주의론과 같은 독자적 사상을 이루기도 하였다.
모택동에 대해서는 "공보다 과가 많은 사람", "건국의 공이 있지만 한편으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과 역시 극명한 사람"[1]이라는 비판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80년대 개혁개방정책 이후부터 나타난 새로운 인민의 문제를 치유하는 데 있어서는 모택동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주장도 있다.

생애

공산당 창당 이전 시절(1893~1921)

출생

모택동의 출생과 가족관계 등 그의 성장 이야기는 에드가 스노우의 모택동 인터뷰로 세상에 알려졌다. 마오를 직접 인터뷰한 뒤 『중국의 붉은 별』에 이를 수록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모택동은 1893년 12월 26일 호남성 상담현 소산충에서 태어났다. 부친 모순생, 모친 문칠매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자는 영지(咏芝)이며, 후에 윤지(潤之)로 바꾸었다. 모택동은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모택동 집안은 부농으로 취급될 정도로 꽤나 부유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꽤나 엄격하게 묘사했으며, 어머니는 자비로운 분으로 묘사한다. 그는 아버지와의 일화를 밝히며 자신의 권리를 투쟁하여 얻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어린시절

1902년 소산의 남안사숙에 들어가 「삼자경」과 「사서」를 배웠으며 서당의 엄한 훈장에게 반항도 하다가 13세에 서당을 그만두었다. 이 무렵 시국을 비판한 정관웅의 「성세위언」(盛世危言)을 읽고 자극을 받았다. 「성세위언」은 청나라 말기 정관잉이 쓴 책으로 서양의 군사기술만을 배우고자하는 양무운동을 비판하고, 정치·경제·사회 전면에 걸친 제도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모택동에게 「성세위언」은 유교경전의 숙지만을 바랐던 아버지 몰래 밤마다 읽을 정도로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고, 이 책을 통해 서양학문과 문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1907년에는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상향현의 신식학교인 현립 동산고등소학당에 입학하였으며, 이 때 강유위의 개혁에 관한 책과 양계초의 『신민총보』 읽고 이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중국의 고대 통치자와 관련된 책과 외국의 역사나 지리에 대한 책들을 탐독하였다.

소년~청년시절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에 장사의 상향중학에 입학하였다. 1911년 10월에는 후난의 신식군대에 6개월 정도 가담하였다. 이 시기에 '상강일보'에서 당시 혁명을 다루었었는데, 이를 통해 모택동은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손문원세개가 협정을 맺으며 손문 중심의 남경정부가 해산되었고, 모택동 역시 그 이듬해 2월이 되자 군대에서 제대하였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보다 2년이 흐른 1913년, 모택동은 호남 성립 제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양창제, 원문길 등의 교사에게 지도를 받았다. 양창제는 후에 모택동의 장인이 되기도 한다. 1918년에 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신민학회(新民學會)를 구성하였고, 어머니가 사망한 후 9월이 되면 가족과 관계를 끊고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 도서관 사서 보조로 근무하게 된다. 모택동은 도서관 사서 보조로 근무하면서 돈이 부족하더라도 비교적 책을 마음껏 탐독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의 글을 비롯해 많은 책을 읽었다. 1919년에는 상해에서 진독수를 만나고, 다시 장사로 돌아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개 강연을 하기도 한다. 『공산당 선언』을 읽었으며, 상강평론(湘江評論)을 발간하고, 군벌 장경요 추방운동도 일으켰다. 모택동은 1920년 여름부터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했으며, 그에 따라 무정부주의, 공상적 사회주의, 개혁주의 등은 그의 정치사상을 위한 뼈대에서 배제했다. 이 때 모택동은 제일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좌익 서적 출판을 위해 문화서사(文化書社)를 설립했다. 당해 겨울에 양개혜와 결혼한다.

건국 이전(1921~1949)

공산당 창당

1921년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자 일지는 몰라도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중국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진독수는 1919년에 러시아인을 통해 코민테른과 접촉을 하기 시작한 상태였고 1921년 드디어 상하이에서 공산당은 창당되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 것이 이 당시의 모택동은 창당대회에 참여하기는 했을지언정 결코 당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상하이에 가보면 공산당 창당 기념관이 있는데, 모택동이 회의 당시 일어나서 발언을 하는 듯한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하지만 과연 실제 회의에서 이러한 연설을 했을지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박물관에 있는 바로 이 모형이다.

공산당 생활

공산당 창립 이후, 이곳에 속해 있는 동안 모택동은 (자신이 농민출신이라서 인지) 농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고 농민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파악하였다. 1922년 당시 모택동은 호남성 지부의 서기로 있었는데 훗날 회고하기를 당시 진독수 휘하의 공산당의 활동은 주로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집중이 되었을 뿐, 농민들에게는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었다고 한다.[2] 1927년에는 농민의 혁명 투쟁에 대한 당시 당내외의 비판들에 답변하기 위해 『호남농민운동 시찰보고』라는 글을 써 중앙위원회에 제출하며 [3] 농민 운동에 대한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도록 촉구하였다. 하지만 진독수를 위시한 공산당은 여전히 농민에게 관심이 없었다. 당이 농민에게 내재된 가능성을 간과하고 시간이 흐른 뒤, 1927년 장개석국민당이 4.12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학살당하였으며 국민당과 정부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여 무한에 있던 공산당 무한정부는 결국 소멸되고 만다.

정강산 시절

1927년 8월 1일 국민당의 학살에 대한 반동으로 하룡엽정이 이끄는 제20군은 주덕과 힘을 합쳐 남창봉기를 일으킨다. (이를 기려 지금도 중국의 8월1일은 군인의 날이다.) 모택동 또한 소규모 군대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며 호남성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정강산에 들어간다. (흔히들 이 정강산을 지리산에 들어간 빨치산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강산은 산새가 험하고 둘레 500리, 직경 80리가 되는 거대한 산이다.) 모택동은 1927년 겨울부터 1929년 초까지 정강산에 있었는데 이곳에 있는 동안 힘을 크게 키운다. 당시 정강산에서 산적을 하고 있던 왕좌와 원문재의 군대를 합류시키고 1928년 5월에는 주덕의 군대가 정강산에 도착하였고 ‘모주군毛朱軍’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홍군 제4군이 탄생하였다. 정강산은 지형이 험하고 요새로서의 기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 산을 탈환하기 위한 국민당의 군대들을 모두 물리쳤다. 1929년이 1월 이들은 정강산에서 나왔다.

강서 소비에트 성립

정강산에서 나온 이들은 강서성 남부지역에서 혁명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여러차례 성공을 거둔다. 차츰 강서성 남부는 거의 홍군의 수중에 장악되었고 1929년 12월 복건성 서부지역에서 개최된 제 4군 제 9차 당원대표회의에서 이들은 강서성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기로 합의한다. 이들의 첫 근거지가 수립된 셈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들이 근거지를 마련한 것을 그냥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는데 이들을 없애버리기 위한 초공전을 계획한다. 1930년 말. 제 1차 초공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에 이러지는 계속된 초공전에도 홍군의 강서 소비에트는 무너지지 않았는데 이들을 정강산 시절부터 써오던 게릴라 전략으로 국민당의 군대에 맞섰기 때문이다. 게릴라 전략은 다음과 같다.
敌进我退-적이 오면 우리는 도망간다.
敌止我扰-적이 멈추면 우리는 적을 괴롭힌다.
敌避我击-적이 피하면 우리는 공격한다.
敌退我进-적이 도망치면 우리는 추격한다.
제 4차 초공전까지는 홍군이 승리를 거두지만 제 5차 초공전은 그 양상이 달랐다.

대장정

대정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고
독일에서 군사 고문까지 초빙해 홍군의 씨를 말리려고 한 장개석의 5차 초공전으로 인해 1934년 10월 강서 소비에트는 붕괴를 맞이하게 되고 이들을 그 끝을 모르는 후퇴를 하게 된다. 처음 시작을 할 당시만 하더라도 길을 걸어가는 그 누구도 이 걸음이 1년동안 이어진 대장정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에 8만여명이 출발하였으나 1년이라는 시간동안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걸으며 산시성 북부에 도착할 때는 6천여명의 병사만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들은 1935년 10월 368일간의 장정의 종언을 선언하고 이곳에서 힘을 키운다.

제2차 국공합작

국공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일본의 중국침략은 계속되고 있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전에 없던 더 강력한 항일 운동이 학생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1933년 5월 장개석의 공격에 대패한 공산당은 대장정을 시작한다. 일본의 위협이 점점 커지자 공산당은 국민당에 '소비에트 공격 중지, 민중의 정치적 권리 보장, 민중의 무장 용인' 등의 조건이 수용된다면 함께 항일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안내양외(安內攘外, 국내의 적을 일소한 다음, 외국의 침략을 막는다)' 정책을 고집하면서 연안에 있는 공산당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를 바꾼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1936년 12월 장개석의 부하였던 장학량이 서안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장개석을 구금하고 국민당공산당과 연합을 하도록 한 사건이다. 이 일로 인해 공산당국민당 사이의 싸움은 잠시 정지가 되고, 국민들의 항일투쟁에 대한 요구와 함께 점점 중국 대륙으로 침략해 오는 일본에 대해 힘을 합쳐 맞서게 된다. 1937년 항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같이 싸운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남은 것은 이 드넓은 중국 대륙을 누가 차지하느냐 였다. 이에 공산당과 국민당은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

국공 내전 재개

항일전쟁 이후 1945년 미국은 국민당공산당을 중재하여 연립정부를 구성시키려고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6년 국민당은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공산당을 먼저 공격하는 판단을 내린다. 초반에는 국민당의 파상공세로 공산당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과오로 인해 공산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결국 상황은 국민당군이 서서히 열세에 처하게 되었고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만주지역의 중화민국 국군을 섬멸하면서부터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에 국민당은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리쭝런이 대표로 재협상을 시도하지만 공산당은 이미 승기를 잡았기 때문에 재협상 시도를 무시한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건국 이후(1949~1976)

쌍백방침과 반우파투쟁

제1차 5개년 계획 이후 중국의 공산당은 관료화와 규칙화되고, 새로은 엘리트 계층이 출현한다. 마오쩌둥은 당이 옳지 못한 길을 걷고 있으며 외부에서 당을 흔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마오쩌둥은 "백가쟁명 백화제방"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지식인들에게 당을 비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당이 이를 제지하려하자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이라는 연설도 발표하며 지식인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거세지자 "현재 우파반동세력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의 선언에 동참하며 비판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비판자들과 특히 민주정당 인사에게 집중적으로 자기비판이 강요되고, 작가와 예술가에 대해 가혹한 보복도 이루어진다. 마오쩌둥은 이 기회를 이용해 50~70만 명의 "우파"를 숙청하며 다시 당의 권력을 잡는다. 이를 반우파투쟁이라고 한다. 반우파 투쟁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있다. 백화제방이 애초에 공산당이 반대파를 색출하기 위해 놓은 덫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공산당은 모리스 마이스너에 따르면, 이 당신 공산당은 결코 하나의 통일체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보단 백화제방은 당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의도에 따른 것인데, 이때 지식인들은 공산당이 사회주의 원칙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으나, 마오는 결국 이들이 사회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반우파투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4]

대약진운동

대약진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고
중소분쟁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마오쩌뚱은 중국의 전략적 위치에 위기감을 느낀다. 그 결과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은 기술은 적되 인력은 많으므로 노동력을 총체적으로 이용하여 기술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농촌의 공업화로 도농 동시 발전을 꾀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전국에 7만개의 인민공사를 조직하여 대약진 운동의 고삐를 바삐 당겼지만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철 생산량의 양적 팽창에 열을 들였지만 아무런 기술적,경제적 기반도 없이 영국보다 더 많은 철강생산을 위해 온 인민을 제철사업에 총동원했다. 터무니없는 생산 목표치 때문에 철강 생산량을 올리려고 농기구의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철강으로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재래식 제철법으로 생산한 철은 90%가 사용 불가능했다. 이렇게 인력과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려 농업 생산량에 큰 차질을 빚었지만 이 상황에서 마오쩌뚱은 참새를 해로운 새라고 말해 결국 병충해의 창궐로 이어졌다. 게다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와 관료주의에 젖은 지방 관리들의 실적 날조 때문에 대약진운동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문화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너무나 처절한 것이어서, 결국 마오쩌뚱은 국가 주석직을 사임한다. 마오쩌뚱이 실권에서 밀려난 동안 류사오치덩샤오핑이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실권을 장악해갔고, 마오쩌둥은 점점 상징적 위치로 밀려났다. 대약진 운동 이후 1960년대 조정정책은 경제 회복을 이끌어냈으나 사회불평등의 격화, 이데올로기적 이상향 약화, 새로운 관료 엘리트층의 공고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마오쩌뚱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실시한다. 4대 자유를 통해 당내 주자파를 타도하고 사구를 타파하는 등 홍위병을 비롯한 대중 운동을 통해 상부구조 개혁을 꾀했다. 그러나 몇몇 집단의 사회운동이 초기 마오쩌뚱이 승인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홍색테러로 변질되면서 많은 학자들과 문인들, 일반 대중들이 부당하게 고초를 겪었고 심지어 홍위병 내부 분파끼리도 사회운동의 방향을 두고 마찰이 발생해 서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으며 사회 전반이 마비에 이르렀다. 정권을 재탈환한 마오쩌뚱은 문화대혁명이 자칫 무정부주의로 빠져 국가라는 개념이 파괴될 것을 우려해 더 이상의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이용해 이들을 진압하고 하방시켰다.[5] 결국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1981년의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혁은 당, 국가, 인민에게 커다란 재난을 초래한 내란이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덧붙여 마오쩌뚱이 문혁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긴 했지만 전체 일생을 보면 공적이 첫째이고 오류가 두 번째라는 공칠과삼(功七過三), 즉 7할은 공이 있고 3할이 과오라고 공식 선언했다. 아직까지도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부분의 정부문서는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망

"자고로 사람이 70년을 사는 것은 드문데, 나는 이미 80여세이다. 사람이 늙으면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한다. 중국의 격언에는 관 뚜껑을 닫은 후에야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 관 뚜껑을 덮지 않았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므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생을 통해 두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장제스와 수십년간 싸워 그를 몇개의 섬으로 쫓아보낸 것이다. 8년 항전으로 일본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베이징으로 진격하여 자금성으로 들어온 것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의를 다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다만 일찌감치 그 섬을 차지했어야 했다고 몇몇이 내 귓가에서 재잘거릴 뿐이다. 다른 하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문혁을 일으킨 일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두가지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그 과업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야 한다. 어떻게 넘겨야 하는가? 평화롭게 넘기지 못하면 혼란을 통해 넘겨야 하는데,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피바람이 일 것이다. 너희들이 어떻게 할지는 하늘만이 알뿐이다."
-마오쩌둥이 병이 위중해졌을 때 화궈펑, 왕홍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왕하이룽 등을 불러서 한 말. 1976년 1월 13일 혹은 6월 15일에 말했을 두가지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그 중 6월 15일의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뚱의 편에 서서 문혁에 적극 가담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공식적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린뱌오가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 쿠데타를 준비하게 된다. 1971년 린뱌오와 그의 부하들은 마오쩌둥을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는 사전에 감지되어 실패하고 린뱌오는 소련으로 도망가다가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마오쩌둥은 후계자로 지목할 만큼 가까웠던 자신의 부하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정신적 충격 때문에 마오쩌뚱은 권력에 한 발 떨어져 있는 태도를 보였고, 이후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이 이끈 사인방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사인방은 마오쩌뚱이 죽고 난 후의 국정장악을 노려 미디어 등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확충시키려고 했다. 이를 우려하던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때 실각하여 엔진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복권시켰으나, 사인방은 덩샤오핑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실각시키려고 했다. 마침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이에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인파가 천안문광장에 모이자 사인방은 이를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그리고는 이 혼란의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씌우고 마오의 이름으로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9일 사망했고 중국은 애도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참고자료

1. 「모택동의 생애와 사상」, 김권집, 2011
2. 『중국의 붉은 별』, 에드가 스노우, 2004
3. 『모택동 선집』, 모택동 지음, 김승일 옮김, 2001
4.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모리스 마이스너, 2004
5.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모리스 마이스너,2004
6. 『덩샤오핑 시대의 탄생』, 안치영, 2013
7. https://namu.wiki/w/%EB%A7%88%EC%98%A4%EC%A9%8C%EB%91%A5
8.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8%A4%EC%A9%8C%EB%91%A5

각주

  1.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1981)에서 등소평은 모택동은 공이 7, 과가 3이라는 평을 내렸다. 속칭 '공칠과삼론자'들이 모택동의 공과 과를 무엇으로 보는지는 천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만약 마오 주석이 1956년(대약진 운동 이전)에 서거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겁니다. 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이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퇴색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2. 에드가 스노우, 홍수원 외 3명 옮김, 『중국의 붉은 별』, 2004, p.189
  3. 모택동, 김승일 옮김, 『모택동 선집』, 범우사, 2001, p.29
  4. 모리스 마이스너,『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2004, p.265
  5. 모리스 마이스너,『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2004, p.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