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관점들
권력투쟁설
문혁 연구에서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다. 문혁을 정치학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마오쩌둥이 문혁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여 권력을 다시 되찾으려 했다는 주장이 주를 이룬다. 권력투쟁설은 다시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과 넓은 의미의 권력투쟁설로 나뉜다.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은 당 지도부 내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마오쩌둥이 권력을 다시 사로잡기 위해 대중을 선동해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59년 마오쩌둥은 일선에서 물러나 류사오치에게 실권을 넘겨주었는데, 마오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당 내부의 정상적인 경로로 뒤집을 수 없었던 마오가 대중을 선동하고 부추겨서 집권파를 제거하고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실각하고 마오는 권력을 재장악하였다.
넓은 의미의 권력투쟁설
개인의 야욕만으로 설명하기보다, 권력다툼의 배경으로 '노선 대립'을 제시한 설명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마오가 자신의 노선을 추구하기 위해 대중을 선동시켜 정적을 제거, 권력을 재장악했다는 설명으로 귀결되어 기본적으로 권력투쟁설에 해당한다.
한계
분석의 시야를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로 한정하고 있다. 문혁 전체 과정을 마오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고 본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실각과 마오의 권력 재장악을 핵심적으로 파악하고, 반면에 문혁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덜 주목한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1966년 8월 8기 11중전회, 혹은 더 늦게 10월의 중앙공작회의에서 류사오치가 사실상 권력을 잃은 국면에서도 대중적 공세를 강화했던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대중은 마오가 선동하고자 하면 쉽게 선동할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이며, 문혁의 전체 과정 동안 동질적인 세력이었던 걸로 간주된다. 하지만 문혁 과정 동안 대중들은 각각 매우 상이하고 분열적이었으며, 항상 마오의 호소와 통제에 따라 움직였던 것도 아니었다. 만약 대중이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였다면, 1967년 이후 마오가 대중에 대한 통제력을 잃거나 군을 개입시켰던 일련의 과정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우한 7·20 사태 등) 한편, 마오쩌둥의 '계속혁명론' 즉 사회주의 하에서도 늘 자본주의로 복귀할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것들이 그저 권력을 재장악하려는 시도를 보기 좋게 포장하는 명분에 불과했다면, 문혁 기간 중에 반복해서 등장한 파리코뮌 모델을 모방하려던 노력들과 새로운 제도적 실험들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덮여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