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목차
개요
일반적으로 내셔널리즘은 하나의 네이션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 즉 하나의 독립 국가를 영위하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민족주의는 서양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번역어이다. 하지만 내셔널리즘은 동아시아권에서 국가주의, 국민주의로 번역되기도 한다. 특히 내셔널리즘은 주로 일본에서는 국가주의, 한국에서는 민족주의, 중국에서는 애국주의로 해석된다.
한 견해에 따르면, 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의 첫 사용은 1409년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교수들을 구성하는 4개의 나치온(Nations)들이 각 구성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합을 가리키는 말에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잘 사용되지 않다가 18세기 들어 헤르더의 글 속에 나타났지만, 편견이나 편협한 생각 정도의 의미를 갖는 단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1836년판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특정한 네이션들이 신의 선택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교의"라고 풀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1844년에는 집단이기주의와 같은 의미로 풀이되었다.
오늘날 내셔널리즘은 애국주의(patriotism) 혹은 쇼비니즘(chauvinism; 영어로 jingoism)과 같은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애국주의는 향토 사랑에서 나온 말로, 근대 이후의 것인 내셔널리즘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쇼비니즘은 맹목적 애국주의, 배타적 호전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로 이 역시 내셔널리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차기벽은 내셔널리즘은 다음 10가지 요소의 복합체라고 설명했다. ①특정 지역 ②언어, 관습, 습관, 문학과 같은 공통된 문화적 특성 ③공통된 정치적, 사회적 제도 ④독립·주권 정부 또는 하나가 되려는 갈망 ⑤공통된 역사 및 기원에 대한 믿음 ⑥같은 네이션 성원에 대한 애정과 존경 ⑦네이션이라는 실체에 대한 헌신 ⑧네이션의 발전에 대한 공통된 긍지와 그 비극에 대한 공통된 슬픔 ⑨반(反)네이션적 집단에 대한 무관심 내지 적의 ⑩네이션의 위대하고 영광된 미래에 대한 희망
쑨원의 민족주의
주장 이유
쑨원은 전세계가 민족국가 체제로 재편된 상황 속에서 구국을 위해 민족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가족주의와 종족주의만 존재했기 때문에 단결력이 없어 흩어진 모래알과 같다고 비유했다. 중국인은 가족과 종족에 대한 희생은 있었지만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국족주의는 없었던 것이다.
쑨원은 중국이 4천여년의 문명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정신이 결여되어 있어 서구열강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제창하여 4억인을 단결시켜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중국은 결국 멸망하여 민족이 멸종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내용
민족주의는 쑨원의 삼민주의 중 하나이다. 쑨원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왕도와 패도로 설명한다. 국가는 무력을 이용하여 형성된 것에 반하여 민족은 자연의 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자연력은 왕도이며, 왕도에 의해 성립된 단체가 곧 민족이다. 중국은 왕도에 의해 자연스럽게 성립된 민족이 곧 국가이지만 영국 같은 국가는 무력, 즉 패도에 의해 세워진 국가라는 것이다. 또한 민족을 형성하는 요인은 혈통, 생활, 언어, 종교, 풍속과 습관이다.
한 민족이 다른민족을 정복하게 되면 피정복민족의 독자적 사상을 배격하게 된다. 만주족 또한 한족의 민족사상을 소멸시켰다. 특히 건륭제는 더욱 교활하여 만주족과 한족의 구별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 결과 건륭제 이후 지식인들은 민족사상을 알지 못하게 되었고, 민족사상은 하층민들 사이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세계주의란 이적(夷狄)과 화하(華夏)를 구분하지 않는 것인데, 중국인의 대다수가 세계주의만 외치고 민족주의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10만 명의 만주족이 수억의 중국인을 정복할 수 있었다. 청대 만주족의 통치와 세계주의로 잃어버렸던 민족사상을 되찾아야 한다.
명조의 후예들이 회당(會黨)을 조직하고, 한족 통치계급이 버린 민족사상을 하층 사회에서 구전으로 선전하는 방식으로 보존해왔다. 대체로 해외 화교들 가운데 회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민족의 인구는 총 4억명이다. 이 중에 몽고족, 만주족, 티벳족, 화교도, 돌궐족 등 소수 민족의 수는 총 1천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중국의 4억 인구 대다수가 한족으로 혈통, 언어, 문자, 종교, 습관 등을 같이하는 완전한 민족이다.
쑨원의 민족주의의 변화
쑨원의 민족주의는 중국 내외의 정세에 따라 변해갔다. 쑨원은 청말에는 청조의 전복을 위해 만주족을 배척하는 한족중심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만주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국을 회복하여, 통일정부 세우자’라고 주장하며 만주족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이것은 한족의 감정적 단결을 이끌어 신해혁명의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으나 이것이 아무리 혁명의 구실로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쑨원이 한족의 편에서 다른 민족을 멸시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신해혁명 이후 임시대총통 취임 시, 쑨원은 청말에 펼쳤던 한족중심 민족주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다섯 개 민족(한족, 만주족, 몽고적, 티벳족, 회족)을 포괄하는 오족공화를 주장하며 포용적 민족주의를 펼친다.
쑨원은 이후 ‘중화민족주의’를 주장한다. 20세기 새로운 중화주의의 탄생인 것이다. 그는 1920년 중국 국민당본부회의에서 기존의 오족공화주의를 벗어나자고 말한다. 중국에는 오족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족 이외에도 모든 소수 민족이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아시아주의
내용
쑨원은 민족주의에서 나아가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쑨원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서양의 공리와 강권을 주장하는 패도와 동양의 인의도덕을 주장하는 왕도의 대결로 간주하고, 동양의 왕도가 서양의 과학기술을 흡수함으로써 패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쑨원은 아시아 전체 민족들의 연합이 있어야 아시아 전체 민족의 독립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들이 연합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중일 양국의 공동영도를 주장했다.
한계 및 문제점
쑨원은 여전히 전통적인 중화세계관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중국이 당면 문제를 해결하여 다시 강성해진다면 전통적인 중화세계를 재건하고자 하는 희망도 나타내었다. 1923년 8월 19일 광저우에서 개최된 전국학생평의회의 연설에서 쑨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10여 년 전에 태국에 가서 그(태국 외무부차관)를 만났을 때, 그는 중국이 만약 혁명을 완수해서 부강해 진다면 우리 태국은 중국의 한 성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중국이 만약 강성해진다면 한국과 베트남도 중국에 가입하는 것을 허가해주도록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 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아시아 각국의 공동 번영으로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슬로건으로 이용되었다.
참조
마오쩌둥,『모택동선집1,2』,김승일옮김,범우사,1991년.
쑨원,『삼민주의』,김승일(외)옮김,『범우사,2000년.
양순창, 손문의 대아시아주의에 나타난 일방성과 다자성, Vol.13 No.2, 2005, P.313~333.
펄S.벅,『청년쑨원』,은하랑옮김,길산,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