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여사대사건
목차
개요
1924년 말, 베이징 여자 사범대학에서 학생운동이 폭발했다. 사건은 교장 양인위(杨蔭榆)가 세 명의 학생을 제적한 데서 야기되었다. 다음 해 5월 학교에서 또 다시 충돌이 일어나 여사대 측에서 사람을 시켜 학생들을 구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학교 측 행동은 베이징 학인(學人)들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1]
사건 발단
당시는 5.4 운동의 발전으로 지식층이 분화되고,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제국주의, 베이양 군벌, 부르주아 계급 동조자로서 악명을 떨쳐갔다. 루쉰은 위와 같은 어용 문인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북경여사대사건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로 확산되었다. 1924년 쉬서우창이 베이징여사대 교장 직위를 사직하고 그 후임으로 양인위가 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북경여사대사건의 발단이라고 볼 수 있다.
양인위교장의 즉위
1924년 양인위 교장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여자 대학교 교장으로서, 북경여사대에 임명되었다. 양인위는 당시 권력을 잡은 돤치루이 정부의 교육 총장이었으며, 현대평론파 문인인 천시잉 등과 매우 가까웠다. 양인위는 오랜 유학 경험으로, 미국이나 유럽계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중국의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당시 신해혁명과 5.4운동을 겪은 뒤, 국민들, 특히 대학생들은 전제 정치나 독재와 부패에 대해 엄청난 혐오와 경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사회의 불공정함과 부패에 대항하려는 전투적인 정신이 가득했고, 권위에 용감히 도전할 줄 알았으며, 억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양 교장의 만행
양 교장은 학생들에게 질서 있는 학풍과 학교의 규율을 강조하여, 학업에만 몰두하고 다른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학생들의 애국운동(爱国行为)를 일률적으로 “부정한 학풍”으로 치부하였고, 독단적으로 학생들을 배척했다. 비록 그녀는 학교에서 처리해야 하는 행정사무를 완전히 방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 관련 일을 처리하는 데에 융통성이 부족했고, 독단적이고 불공정한 일 처리를 감행했다. 양 교장은 자기와 다른 세력을 배척하기 위해 학생들을 탄압했으며, 사욕을 채우기 위해 학교 규정을 위반하고 학생들에게 별도의 비용을 징수하기도 했다. 이는 봉건적인 가장(家長)과 같은 모습으로, 학생들의 사상과 행동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사건 전개
양교장배척운동
1924년 가을 학기 개학을 앞둔 시기에, 남쪽 지방에서 홍수가 발생하고, 강소성∙절강성에서 분쟁이 발발했다. 이 때문에 일부 학생들은 제 시간에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다. 양 교장은 이를 빌미로 학풍을 정돈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학칙을 새로 제정했다. 해당 학칙의 내용은, '제 시간에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은 모두 제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 교장이 구체적으로 학생들을 처리할 때는, 결코 공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에 순종적이지 않았던 국문과 학생 3명을 엄중히 처벌하였고, 그들에게 퇴학을 요구했다. 그리고 본인과 관계가 좋았던 학생들의 경우에는 별다른 조치 없이 넘어갔다. 이와 같이 한 눈에 보아도 공평하지 않은 일 처리 방식은 여사대의 학생과 교직원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이들의 양교장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은 이 때 폭발하였다.
1925년 1월, 여사대 학생자치회는 양 교장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선언서를 직접 전달했고, 자치회 대표는 양 교장의 그간 부패 정황을 자세히 진술하여 교육부에 제출하고, 다른 교장으로 교체를 요구했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장스자오가 사법부 총장과 교육부 총장을 겸임하게 되었고, “학풍 정돈”을 강조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양 교장을 지지하였다.
국치기념일
1915년 5월 7일에 일본 정부가 베이양 군벌을 협박해 21개 조항에 서명하게 하자 거국적으로 반일 애국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이를 국치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리고 1925년 5월 7일, 국치기념일이 되었고, 이 날은 양 교장이 학생들을 배척하는 행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날, 베이징 여사대에서는 기념식이 있었고, 양 교장은 이 기념식에 대외적으로 많은 인사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자 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대에 올라서 사회를 맡았다. 하지만 이는 양 교장이 사전에 학생들을 탄압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해 놓은 작전에 불과했다. 기념식 진행 도중 학생들이 양 교장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양 교장이 평소 못마땅하게 여기던 학생들을 정당하게 배척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강연회가 시작하기 전부터 교장에게 참여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결국 양 교장은 회의에 참석했고, 이에 따른 학생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당연한 결과로, 5월 9일, 양 교장은 학교 평의회의 명분을 빌려 류허전, 쉬광핑 등 6명의 학생 자치회 성원을 제적했다. 학생들을 정당한 명목으로 배척하려 했던 양 교장의 작전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더 거세게 교장을 배척하려 했다. 이때 당시, 베이징 여사대에서의 기념식을 포함하여 학교 외부에서도 베이양 군벌이 학생들의 애국 운동을 탄압했다는 사실은 당시 진보적인 베이징 문화계 인사들을 분노하게 했다. 위와 같은 상황을 통해 베이징 여사대의 ‘양교장배척운동’이 본격화되었다.
11일, 여사대 학생들은 긴급 회의를 개최하였고, 양 교장을 몰아내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驱杨运动特刊》(양교장배척운동 특집호)를 출판하기도 했다.
베이징여사대 2차 대치
양인위는 제국주의 세력의 보호를 받으며 모든 준비를 마쳤고, 곧바로 학생들에게 또 한 차례 공격을 퍼부었다.[2]
1925년 8월 1일, 양 교장은 무장군인과 폭력배들을 고용해, 학교의 진보 학생들을 몰아내려 했다. 학생들이 이에 투항하자 양 교장은 굴하지 않고, 학교를 포위하고 학교 전기를 끊고 교문을 봉쇄하는 등 더 난폭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포위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대학들을 비롯해 일반 대중까지도 양 교장과 교육 당국에 대해 격분하게 만들었다.
8월 7일, 루쉰과 쉬서우창을 중심으로 하는 ‘여자사범대학 교무유지회’가 발족되었다. 베이징여사대와 베이양 군벌 간의 관계를 끊을 것을 선포하고, 베이징 소재의 다른 학교와 교육 단체들과 함께 베이양 군벌의 교육총장 장스자오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배포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굴하지 않고 8월 17일 여자사범대학을 ‘베이징여자대학’으로 개편한다고 선포했으며, 군인, 경찰, 폭력배들을 동원해 학교에 있는 학생들에게 구타를 가하고 일부 학생들을 체포했다. 8월 26일, 돤치루이 행정부에서 ‘학풍 정화령’을 선포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탄압하였고, 천시잉 등의 부르주아 문인 세력도 이때를 기점으로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군벌 정부가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한 사실을 은폐하기도 했다.
결과
베이양 군벌의 교육부는 여론의 강력한 압박을 견디지 못해, 양 교장을 파면했고, 1925년 8월 4일, 양인위는 《晨报》에 ‘사직 소감문’을 개제하였다.[3]
"矢志以女子教育为职责,毁之劳怨,所不敢辞……维持至于今日者,非贪恋个人之地位,为彻底整饬学风计也。"
1925년 하반기, 북경여사대사건은 점점 고조되었고, 당시 남쪽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혁명세력과, 베이징 민중들의 투쟁에 힘입어, 폭넓은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이와 같은 상황 덕분에 북경여사대사건은 학생들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이후 1925년 11월 30일, 여자사범대학은 학교 문을 다시 연다고 선포하였다.
교육총장은 톈진으로 도망치고, 양인위는 교장 직에서 물러났으며, 베이징여자대학은 자연히 취소되었다. 학생들은 다시 본래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루쉰과 북경여사대사건
루쉰은 다른 베이징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학생들의 편에 서, 양인위 교장과 베이양 군벌 세력에 대항하였다. 국치기념일의 사건이 있고 난 뒤, 5월 27일, 루쉰은 『베이징 여자 사범대학 사태에 대한 선언(对于北京女子师范大学风潮宣言)』이란 글을 기초하였다. 이 선언은 루쉰, 저우쭈어런 등 7명이 공동 서명하여 「경보(京报)」에 게재하였고, 해당 선언문에서 루쉰은 양인위가 학생을 진압한 폭거에 대해 극렬한 분노를 표명하고 있다.
1925년 8월 1일, 여사대에서의 2차 투쟁 이후 강제로 길 위로 내몰린 학생들은 길에서 자비로 교실을 빌려 본인들을 도우는 선생님들을 초청해 수업을 재개했다. 루쉰도 이에 적극 지지하는 선생님들 중 하나였다. 루쉰은 이후 변변치 않은 이유로 교육 당국에 의해 교육부 참사 자리에서 불법 해직 당했다. 이후 루쉰은 직접 글을 써 교육 당국의 지배 세력을 규탄했다.
影音与一日不除,即如刀俎在前,学生为鱼肉。
-- 1925년 5월 12일, 《为毕竟女师大学生拟呈教育部文》에서 양 교장이 학생들을 제적하는 것에 대해, 직무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 징계를 내렸다고 판단했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论‘费厄沷赖应该缓行’)>
북경여사대사건이 마무리 될 무렵, 저우쭤런과 린위탕은 ‘패배한 교육 당국을 더 이상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저우쭤런은 “물에 빠진 개는 때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고, 린위탕은 “패배한 자들에 대해 더는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은 ‘페어플레이’ 정신이 부족하므로 이를 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제국주의와 봉건군벌들을 편드는 현대평론파의 어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루쉰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글로 반박했다. 루쉰은 오히려 자본가의 앞잡이들에게는 ‘페어플레이’를 이야기할 수 없으며, ‘물에 빠진 개’(패배한 자)를 때려야 한다고 반박했다.
참고문헌
- 왕스징, 신영복∙유세종 역,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다섯수레, 2007, pp.268-294.
- 바이두 백과사전 '杨蔭榆'
- 「第一位女大学校长与“女师大风潮”」, 『铁血社区』
- 「被日军枪杀的中国第一位大学女校长」, 『凤凰:历史』
- 「杨蔭榆:女校长的教育梦」, 『国学網』
각주
- ↑ 쑨위, 김영문 역, 『루쉰과 저우쭈어런』, 소명출판, 2005, p.300.
- ↑ 1925년 8월 1일 《경보》
- ↑ 「'杨蔭榆:鲁迅笔下“害死”刘和珍的校长'」, 『环球网: 历史』, 201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