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의 패전
오호십육국 시대인 서기 383년 북방의 전진(前秦)이 남방의 동진(东晋)을 정벌하기 위해 남하하였다가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서우현(寿县, 수현) 동남방 화이하(淮河) 지류인 비수(淝水)에서 80여만의 전진(前秦)이 동진(东晋)의 사현(謝玄)이 이끈 8만의 군사에 대패한 전투.
이 전투로 중국의 남북 분립의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되게 되었다. 동진은 이 전투의 승리를 호기로 삼아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黄河) 이남의 옛 영토를 되찾았으나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후에는 수세로 일관하였으며, 전진은 이 전투의 패배로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부견은 385년 치앙족(羌族, 강족) 요장(姚苌)에게 붙잡혀 선양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며 살해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부비가 뒤를 계승했으나 서연에게 대패 후 도망 중 동진군에게 죽었다. 이후에도 일족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394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모용수(慕容垂)는 도중 부견과 헤어진 후 업에서 384년 자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은 동생 모용충과 합세하여 전진의 요장을 격파하고 장안의 함락을 도모하였으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그 뒤를 모용충이 계승하여 서연(西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에게 패한 요장은 치앙족(羌族,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後秦)을 세웠다. 전진의 장군 여광(呂光)은 서역 원정후 복귀 중에 비수의 패전을 듣고 간쑤에서 자립하여 후량(後凉)을 건국하였다. 이와 같이 화베이는은 혼란 속에 빠져들어 전후 10개국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혼란은 386년 탁발규에 의해 부활한 대국(代國)이 북위로 이름을 바꾼 뒤에 세력을 확장해 최종적으로 화베이를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