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간닝변구
개요
섬서陕西,감숙甘肃,녕하宁夏(닝샤) 지역의 변구를 말한다. 내지에 위치한 이 곳은 중국 공산당 중앙의 소재지로 인민 항전의 정치 지도 중심이었으며 팔로군과 신사군, 기타 인민 항일 무장의 전략적 총후방이었다. 변구의 공고화와 건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중국중앙은 변구를 전국 항일 민주의 모범구로 건설하고자 하였다.
특히, 1937년 5월부터 산간닝 변구에서는 계급, 당파, 종교에 관계없이 남녀가 평등하고 민족이 평등한 민주선거가 진행되었다. 10월에는 향, 구, 현의 선거를 마치고 각급 의회와 민주 정부를 수립, 항일 민주정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37년 11월에는 각급의 선거에 기초를 두고 변구 의회선거를 시작하였다. 500여명을 선출하였으나 전시였기에 제대로 소집되지는 못하였다.
산간닝 변구는 여러 민주개혁을 실시하였다. 그곳의 경제, 문화교육수준과 보건 위생을 발전시켰으며 농업생산을 복구하였다. 중국인민 항일 군사정치대학(抗大) 및 루신 예술학원, 등을 창설하였고 군대와 지방을 위한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전국의 수천수만 청년들은 이에 연안으로 왔다. 특히, 이 변구에는 학교, 소학교, 문맹퇴치학교, 식자반을 발전시켜 문맹을 퇴치하였다.
특징
항일 근거지의 정권은 항일민족통일전선 성격의 정권이었다. 즉, 몇개의 혁명계급이 연대하여 민족반역자와 반동파에 대해 민주독재를 실시하는 정권이었다. 이 정권은 지주 자산계급 독재와 구별되고 노농민주독재와도 달랐다. 이 정권은 민주적인 선거와 엄격한 민주주의 중앙집권제에 의해 건립된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입법, 행정, 사법기관이 있었다. 또한 인원구성에는 3.3제원칙(공산당원, 당외 진보인사, 중간파가 각각 3분의 1일 차지)을 실시하였다.
특히, 항일 근거지에서는 인권 문제가 중요했다. 여러 인권조례들은 다음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항일을 하는 모든 인민은 인종, 계급, 당파, 성별, 직업과 종교 신앙에 관계없이 정치적 법률적으로 평등하다. 항일을 하는 모든 인민은 모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거주, 신앙 및 항일자위의 자유가 있다. 항일을 하는 모든 인민은 모두 인신불가침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항일근거지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교육사업에 참가했다. 신강닝 변구에는 소학교 1341개, 중등학교 7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