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목차
개요
소동파(소식(蘇軾) 1037년~1101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생애
소식은 현 쓰촨성(四川省) 메이산(眉山)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며, 이름은 식이지만 동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지식인 집안이면서 저명한 문인집안이었다. 소식은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이었고, 그의 동생인 소철 역시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이었다. 이 세 명의 부자를 삼소(三蘇)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식은 여섯 살 어린나이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능숙하게 글재주를 보였다. 19세에 결혼을 하고, 22세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진사 시험을 주재했던 당대의 글을 잘 짓기로 소문난 구양수(歐陽修)에게 극찬을 받으며 합격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때맞춰 돌아가셔서 삼년간 상을 치러야 해서 일을 하지 못하고 3년간의 세월을 보냈다. 이후 소식은 현재 산시성인 봉상부(鳳翔府) 참판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일을 수행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나서는 변경으로 돌아와 궁정의 사무를 담당했다. 1068년에 소식은 재혼을 했으며, 이 시기가 지나며 신법파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생을 유배생활이나 각지 지방관 생활을 하며 보내게 된다. 1093년 선인태후가 죽고 신법당이 재집권하며 소식은 중국에서 가장 오지로 속하는 해남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고, 결국 1101년 5월 쇠약해진 몸으로 겨우 살다 같은 해 7월에 세상을 떠나며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과거급제까지
소식은 어렸을 적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나이에 맞지 않는 뛰어난 글솜씨를 보였다. 적은 나이인 22살의 나이에 진사로 급제했고, 과거시험을 주재한 구양수(歐陽修)가 후원해줬고, 인정을 받아 문단에 등장했다. 26살이 되던 해에는 제과(制科)에도 합격했다.
관직생활
소식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나서도 바로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3년상, 시묘살이를 마친 후 제과에 응시하고 급제하여 봉상부(鳳翔府) 참판으로 부임해 첫 관직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소식이 관리로 일을 시작한 시기가 신종 황제가 새로운 개혁정치를 시작한 시기이다. 1065년 부인 왕씨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고, 다시 상경한 1068년은 신종이 즉위한 해이면서 소식이 재혼을 하고 변경으로 돌아온 해이기도 하다. 당시 궁정의 사무를 담당했는데 왕안석과의 의견 대립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때가 왕안석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 농촌에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 등의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반대했던 구법파의 중심인물이던 소동파는 중앙관직에서 해임되어 항주, 밀주, 서주, 호주 등의 지방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신법당과 대립, 그리고 유배생활
1071년 소식이 왕안석의 신법(新法)운동에 제일 반대했던 것은 과거에서 시문을 없애고, 경전의 이해 수준 정도만 평가하여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학문이나 도덕과 달리 문학은 인간적인 것으로 세상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시야를 넓혀주는 것으로 문학의 가치에 대한 의견이 대립되었던 것이다.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신법은 정작 백성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백성들의 삶을 더욱 고달프게만 만드는 것을 보고 소식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결국 중앙관직에서 해임되어 수년간 항주, 밀주, 서주, 호주 등의 지방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1071년 항주에서 소식은 통판(通判)이라는 한직(閑職)을 맡았지만 이때부터 소동파의 문학적 재능이 피어났다.
항주로 좌천된 후 4년간 많은 시를 남겼고, 항주의 서호는 소동파의 감수성을 끌어올리는 좋은 문학작품의 탄생지였다. 1074년 밀주(密州)의 태수로 부임을 했으며, 1077년에는 서주(徐州)의 태수로 부임했다. 소동파는 늘 백성들을 가까이에 두고 살폈다.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지목으로 어사대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으며, 당시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이 담긴 기록인 <오대시안>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라고 말한 필화 사건으로 인한 취조를 받고 감옥에 갇혔다.
사형을 면한 소식은 100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 단련부사로 좌천되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몹시 애처로웠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이러한 생활 속에서 적벽부 역시 이곳에서 지어졌다. 또한 동파육도 이때 탄생하게 되었다.
소식이 50세가 되던 해에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했으나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으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아 소식은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으로 유배되었다. 귀양살이를 약 7년간 한 후 사면되어 제거성도옥국관이라는 명예직을 받고 귀양살이가 풀려 상경하던 도중 장쑤성의 상주(常州)에서 이질로 추정되는 병을 얻어 버티다 7월에 사망하여 생을 마감했다.
생애 요약
1037~1061(1~25세) | 성장, 과거급제, 모친상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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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1071(25~35세) | 관직생활, 왕안석과 대립 후 항주로 전출 |
1071~1079(35~43세) | 항주, 밀주, 서주, 호주 지방관 |
1079~1085(43~49세) | 황주로 유배 (신법당을 비판했던 것이 화근) |
1085~1094(49~58세) | 사면 복권 (신종 사망, 선인태후 섭정, 구법당 복권) |
1094~1101(58~65세) | 담주로 유배 및 사망 (선인태후 사망, 철종 친정, 신법당 복권) |
소식의 예술
문학
송대 소식은 왕안석의 신법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소식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적벽부도 유배 시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식은 사마광, 정호, 정이 형제와 더불어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반대하는 정치적 반대자 중 한명이었고, “신법은 작게 쓰면 작게 망하고, 크게 쓰면 크게 실패한다. 쓰면 쓸수록 혼란과 멸망에 이르게된다”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 비판도 행하였다.
소식은 사상의 폭이 매우 넓어서 유가사상을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도가사상(道家思想)과 불가사상(佛家思想)에도 심취해 있었다. 유가사상로 그가 끝까지 관직을 지키며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도가사상과 불가사상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쓰러지지 않도록 그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런 소식의 넓은 사상은 소식의 문학과 예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적벽부(赤壁賦)
소식은 1082년 47세의 나이에 적벽부를 썼는데, 이 해는 황주로 폄관된지 3년째 되는 해였다. 1079년 소식이 호주의 지사로 재임하고 있을 당시 조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소식은 사형될 위기에 처하였다가 동생의 상소 덕에 황주단련부사로 유배되는데 그쳤고, 소식은 황주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소식의 상황을 살펴봤을 때 적벽부는 단순히 인생의 유한함을 논하는 문학작품을 넘어 소식 자신의 정치사상을 구현하고 있는 텍스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적벽부(赤壁賦)의 일부
“일엽편주를 가는 데로 내버려두니 아득히 만경창파를 건너가는구나. 망망함이여, 공중에 올라 바람을 타는 듯, 어디서 멈출 것이냐. 표표함이여, 세상을 버리고 홀로 우뚝 서 있는 듯, 날개 돌아 선계에 오른 듯하구나.”
적벽부는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자연의 무한함에 대한 예찬으로 해석하는 탈정치적 해석과 정치적 해석이 고루 존재하며 이는 후대에 해석하는 이가 남긴 과제로 볼 수 있다. 적벽부는 실로 도입부가 끝나자마자 본격적인 문제제기의 내용으로 들어간다. 손님이 슬픔에 빠져있자 적벽부의 화자(소식)은 “그대는 왜 그런가?” 질문을 하고, 손님은 ‘달이 밝아 별이 희미한데 까마귀와 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 이것은 조조의 시가 아닌가? 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이 빽빽하여 울창하게 푸르다. 이곳은 조조가 주유로부터 곤경을 치렀던 곳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그대와 나는 강에서 낚시하고 나무하며, 물고기 새우와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과 벗하고 한 잎 배를 타고 술동이를 들어 서로에게 권하는 처지로서, 천지에 하루살이가 깃들어 있는 것이요, 넓은 바다에 낟알 하나에 불과할 뿐. 우리 인생이 잠깐임을 슬퍼하고 장강이 무궁함을 부러워하네.
이처럼 대답하는 손님은 유한함과 덧없음을 슬퍼했으나, 적벽은 삼국지가 묘사하고 있는 정치적 영웅들의 쟁패의 상징적 장소임을 알기에 적벽부를 인간의 정치적 열망이 극적으로 충돌했던 상징적 장소를 배경으로 하여 제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서예
소식이 유배생활을 하게 된 동안 그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畫) 등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주변에 많은 문인이 모였다. 소식은 송 4대가로 불리는 명필이었고,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받아 공부했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했고, 해서와 행서를 특히 잘 썼고, 장규각비, 이태백선시권 등이 유명하며, 특히 황주한식시권은 서예사에서 세 번째로 우수한 행서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는 황주에서 유배시절 중 세 번째로 맞은 원풍 5년(1082년) 한식절에 유배된 몸의 우울한 심정을 짓고 쓴 것이다.
음식
소식은 유배지에서도 음식을 통해서 그 지역의 환경에 적응하기도 하고, 이를 기록하여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소식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것만큼 미식가로 통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는 것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요리하여 대접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항주를 대표하는 요리인 동파육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돼지고기는 다른 육류에 비해 보편적으로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서민적 요리 재료인데, 소식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북송 시기에 돼지고기는 매우 싼 가격에 거래되었고, 소설 ‘수호전’에 서민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사실이 증명될 수 있다.
동파육은 소식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요리로 항주와 사천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처음 1077년 서주에 태수로 부임한 시기에 그 지역에 큰 홍수가 나 소식은 백성들과 함께 사투를 벌이며 마침내 치수사업을 성공하고, 모범적인 목민관의 자질을 갖춰 백성들에게 신망을 받았고, 백성들이 감사의 의미로 소식에게 돼지고기를 선물하였고, 그 답례로 소식은 요리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것은 현재 서주의 대표 전통요리인 회중육이다. ‘東坡回贈肉’으로도 불린다.
그 다음 황주로 유배를 갔을 동안 소식은 몹시 궁핍하고 힘든 상황을 겪은 후 겨우 동쪽 언덕에 있는 척박한 땅을 얻어 농부로 살아가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지역 안팎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손수 손님들을 위해 요리를 대접했고, 그가 개발한 동파육을 비롯한 몇 가지 요리법을 손수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파육 조리법 중 일부
“솥을 깨끗이 씻고 물은 조금만 부은 후, 장작을 쌓되 연기와 불꽃일 일지 않게 한다. 불에 맡기고 기다리면 자연스레 맛이 난다. 황주의 질 좋은 돼지고기 가격은 진흙처럼 싸고, 아침에 일어나 두 그릇 해치우니 배부르면 그만이니 그대는 신경쓰지 마시게.(淨洗鍋著水, 柴頭罨烟焰不 起. 待他自熟莫催他, 火候足時他自美.黃州好猪肉, 價賤如泥土.貴人不肯喫, 貧 人不解煮, 早晨起來打兩椀, 飽得自家君莫管.)”
참고문헌
- 《軾文集》 二十卷 <豬肉>, 597쪽.
- 이시찬. 2019. 미식가로서 소식의 삶과 문학의 관계 고찰
- 김영민. 2011. 적벽부와 정치사상. 한국정치연구 제20집 제1호(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