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역사
왕망의 등장과 신의 설립
왕망은 원제 황후의 동생인 왕만의 아들이었다. 성제가 즉위하자 왕황후는 태후가 되었고 왕씨는 외척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왕망은 왕씨 일족이면서도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유학에 전념해 내외에서 현자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순조롭게 관리로 승진을 거듭해 B.C.8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사마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일시 은퇴 상태에 있었지만, 애제가 죽자 9세인 평제를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삼아 정치적 실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다. 왕망은 AD 5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평제를 살해한 후 두 살된 영을 황태자로 삼고 자신을 가황제라 했다. 이어 당시 유행하던 참위설을 이용해 여론을 조작한 끝에 결국 8년에 한의 천하를 찬탈해 신을 건국했다.
왕망의 개혁과 실패
왕망은 즉위하면서 여러 방면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유가의 경전을 근거로 관명을 고치고 서주 시대의 제도를 부활시켰다. 따라서 왕망의 개혁을 총칭하여 탁고개제(托古改制)한 복고 정치라 부른다. 유교 경전을 중시한 왕망은 주대를 이상으로 삼아 《주례》에 의거해 왕전제를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왕토로 국유화시켰다. 대토지의 노동력인 노비에 대해서도 제한을 가하여 노비매매를 금지했으며, 무제 이후 표준화폐 역할을 하던 오수전을 폐지하고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켰다. 그러나 왕망의 개혁은 전국시대 이후 이상화된 유가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탁고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정치와 사회, 경제에 많은 혼란을 초래했다. 서주를 이상화해 시행한 대폭적인 관제의 개혁이나 관명과 지명의 명칭변경은 행정의 비효율로 이어졌고, 오수전의 폐지는 경제 면에서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주변 이민족을 멸시하는 왕망의 정책은 흉노, 고구려와의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실제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고, 전반적인 계획과 준비도 없이 성급하고 즉흥적이었던 왕망의 개혁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반란과 신의 멸망
신(新) 말기에 왕망에 대한 불만이 터지면서 왕망에 반대하는 봉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먼저 18년에 산뚱에서 적미(赤眉)의 난이라는 굶주린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호북의 녹림산에서도 여러 지방의 유민들이 모여 왕광과 왕봉을 지도자로 ‘녹림당’을 만들었다. 한나라 황실의 후예인 유연(劉縯)과 그의 아우 유수(劉秀)도 용릉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앞서 봉기한 반란군이 모두 유연 등의 군사에 합류해서 따랐다. 유연은 녹림병과 함께 유현을 한 황제로 추대하여 연호를 경시(更始)라 하고, 완(宛)에 도읍을 정하였다. 유수의 군대는 23년에 곤양(昆陽)에서 1만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백만 대군의 왕망의 군대와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중국 전쟁 사상 최소의 병력으로 엄청난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해진 ‘곤양의 싸움’이다. 이후 유수의 군대가 왕망을 죽임으로써 신은 16년만에 멸망되었다.
참고문헌
이윤섭, 『왕망』 , 아이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