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고운하
-상위 문서:2015년 답사
길이 1,515km. 베이징에서 항저우에 이르는 허베이·산둥·장쑤·저장 등 4개 성을 남북으로 흐르는 운하.[1]
고운하 古運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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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00px]] 2015 답사 사진 | |
분류 | 자연환경 |
소재지 | 양주 |
관람시간 | 약 1-2시간 |
추천관람시기 | 3-4월 |
중국의 대운하
대운하란?[2]
베이징-항저우 구간을 연결하여 京杭대운하라고도 한다. 하이허강[海河]·황허강[黃河]·화이허강[淮河]·양쯔강[揚子江]·첸탕강[錢唐江] 등 5개의 대하천 사이사이를 개착(開鑿)하여 연결한 운하로, 본래 길이가 1,782km였으나 1958년 대규모의 복구·확장 공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단축되었다. 이 공사는 운하의 깊이·너비를 확장하고 만곡부(灣曲部)를 직선화했을 뿐만 아니라, 홍수방지·농토관개·공업용수 확보 등 하천망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운하 연안에는 13개의 항구가 건설되었고 많은 유수량을 조절하는 수문(水門) 등이 설치되었다. 베이징의 쭤안먼[左安門] 밖에는 4,000t급 기선의 접안이 가능한 부두가 건설되어, 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2,000∼4,000t급의 선박이 취항할 수 있게 되었다.[3]
대운하의 역사
중국에는 전체적으로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하천이 많아 동서를 연결하는 수운이 발달한 반면, 남북 방향은 그렇지 못했다. 이에 수양제는 통제거, 영제거, 산양독, 강남하를 건설해 양쯔강, 황하, 웨이수이강을 거쳐 북경~항주(1782km) 구간의 거대한 운하(경항대운하 京杭大運河)를 건설했다. 대운하의 역사는 일찍이 진(秦)·한(漢)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황허강에서 남동으로 화이허강에 이어지는 수로와, 다시 후일의 산양독(山陽瀆)으로 이어지는 화이허강 ·양쯔강을 잇는 수로가 그때에 이미 열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남북조(南北朝)의 대립기에 매몰되었다. 또 4세기 초 진조(晋朝)가 남천(南遷)한 뒤, 강남의 개발이 진척됨에 따라 삼각주지대에 운하가 열렸으나 주로 지방적으로 이용되는 데 그쳤다.[4]이후 수양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대공사를 일으켜 대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산양독과 강남하는 기존의 운하를 개수한 것이고 영제거와 통제거는 새로이 개설한 것이다. 통제거로 인해 회하와 황하가 연결되었고 영제거로 심하(沁河)와 기수(淇水), 위하(衛河)를 연결하여 천진을 거쳐 북경까지 닿게 되었다. 원나라 때 다시 공사를 하여 회통운하가 건설되었고 이후 명 대에 이르러 송례에 의해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졌다.[5]
대운하의 건설이 양주에 미친 영향
대운하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국 전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정치적 중심지인 화북과 물자가 풍부한 강남이 연결되어 중국 전체의 유통이 활발해졌다. 양주는 동서를 잇는 교역지로 물류의 중심지가 되어 번성하였고 당나라 때 국제항으로서 경제적으로 부흥하였다. 이후 명나라 양회염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거대 염상들이 양주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6] 하지만 점차 물류 유통의 중심 역할을 상해에 뺏기고 육상 교통과 해상 교통의 발달로 운하의 역할마저 축소되자 양주 역시 자연스레 쇠퇴하게 된다. 운하에는 경제적, 정치적 기능 뿐 아니라 풍류적 기능도 있었다. 실제로 수 양제는 이곳에 자주 행차하여 운하를 유람하며 사치스러운 연회를 벌였다고 한다. 현재 양주의 운하는 운송의 기능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주 시민들의 생활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유람선을 타고 양주의 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장식과 운치 있는 조명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녀온 감상
양주고운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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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00px]] 2015 답사 사진2 | |
우리나라는 국토의 면적이 좁아 중국처럼 운하가 발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통해 배운 '운하'의 기능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답사를 준비하며 자세히 조사하다가 운하의 중요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북을 연결하는 운하의 개통은 물자의 원활한 운송 그 이상의 의의를 가진다. 문화적인 교류도 가능하게 하여 중국 대륙에 통일 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운하를 건설한 것이 수양제의 무리한 계획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수나라때 운하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과거는 몰론 현재의 중국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든다.
양주 고운하의 야경이 중국 4대 야경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항주의 서호,상해의 와이탄처럼 유명하지 않아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또 중국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다는 편견도 있어 잘 관리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람선을 타고 직접 느껴본 운하는 내 생각과 매우 달랐다. 일단 특유의 물 냄새도 나지 않아 쾌적했고 운하의 양 옆으로 아름다운 조명을 설치해놓아 매우 이국적이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또 주변의 전통 가옥들과 잘 어우러져 은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상해나 홍콩의 화려한 야경도 몰론 아름답겠지만 자연, 주변 건축물과 어우러진 양주 고운하 특유의 야경은 아름다움과 동시에 여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양주의 고운하는 이제는 운하로 쓰이지 않는 만큼 운송의 기능을 과거에 상실하였다. 답사 전에 가장 핵심적 기능을 상실한 운하가 지금 양주 시민들의 생활과 과연 연관이 있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직접 방문하고 나서는 "양주"라는 도시의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지어준 것이 운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양주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운하는 양주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