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의 중국 과학과 문명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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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당 박정찬 김규리 김현준 김정담 박근영

들어가며

중국과 과학. 이 두 단어를 들으면 좀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발명품들은 대부분 서양의 과학에 기초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중 많은 것들이 이미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아는가? 무려 2천여 년 전부터 중국인들은 엄청난 상상력을 이용하여 수많은 발명품들을 만들어왔다.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들의 과학적 상상력과 능력을 펼쳐왔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의 과학을 재조명한 서양의 학자 조지프 니덤이 평생을 걸쳐서 이룬 중국 과학에 대한 업적을 바탕으로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정한 테마는 ‘일상생활’과 관련 된 것이다. 종이, 인쇄, 칠, 우산, 기계시계, 위스키와 같이 우리가 일상 속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많은 물건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가 봄으로써 우리가 잊고 있던, 어쩌면 모르고 있던 중국 과학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의 발명품

시계

중국의 시계 중국 최초의 기계시계는 8세기에 만들어졌다. 이는 최초의 서양 기계시계가 만들어진 1310년 보다 약 500년 정도가 앞서는 것이다. 중국에서 황제는 우주적인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왕을 이을 황자를 정하는 것 또한 매우 중대한 일이었는데, 이 황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음과 양의 조화의 잘 이루어진 시기를 맞추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점차 이 왕위 계승의 규정과 때가 혼란스러워 지고 잘 지켜지지 않음에 따라 725년 그 때를 정확히 하기 위하여 ‘기계식’ 시계를 발명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물의 동력을 이용해 만들어졌는데, 그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명 이후 개발자에 대한 시기와 진보파, 보수파의 정치싸움으로 인하여 수년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어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서양의 시계 중국의 시계의 몰락 이후 상인들에 의해 시계의 소문이 서양에 전파된 후 1310년에 서양 최초 기계시계가 만들어졌다. 서양 최초의 기계시계는 종을 울려서 수도사들에게 시간을 알리기 위한 용도로 발명·사용되었다. 서양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탑시계였고,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최초의 공중시계는 1335년 밀라노에서 제작·설치되었다. 잉글랜드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계는 솔즈베리 대성당에 있으며, 1386년도에 제작이 되었다. 그 후 1500년경에 독일의 자물쇠 수리공인 P. 헨라인은 스프링으로 작동되는 소형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초의 휴대용 시계였으며, 이 이후부터 시계의 획기적인 진보가 시작 되었다.

현대의 시계 오늘날 같은 정확한 시계의 기반을 제공한 것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진자 이론이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해상진출 경쟁을 벌이면서 보다 정확한 시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후 시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방수시계, 전자 손목시계 등 다양한 시계들이 등장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생활 속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시계가 없는 세상을 상상 해본 적이 있는가? 시계가 없는 세상은 아예 새로운 세상일 것이다. 그만큼 시계는 가장 일상적이지만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랜디와 위스키

중국의 브랜디와 위스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부터 포도주를 마셔왔다. 또 중국은 그 포도주를 증류시켜 만드는 브랜디를 발명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주민은 포도주를 가공하여 보다 더 독한 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포도주나 기타 발효 음료가 얼었을 때 중심부에 얼지 않은 알코올이 남게 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이것을 ‘동주(凍酒)’ 라고 불렀다. 동주는 520년부터 중국황제에게 헌상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에서 착안하여, 중국인들은 더욱 독한 술을 얻을 수 있는 증류기술을 발달 시켜 나갔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증류주가 발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7세기부터 증류주를 만들어 왔으며, 1596년 출판된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증류주의 제조법과 여러 종류의 브랜디와 위스키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서양의 브랜디와 위스키 서양의 알코올 증류법은 12세기 영국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거의 동시에 고안되었다. 당시 증류주는 ‘불타는 물’, ‘생명의 물’ 이라고 불렸는데, 1559년 콘래드 게스너는 ‘생명의 물’ 을 칭송하며 이러한 말을 남긴다. ‘이것은 기분을 바꾸어주고, 슬픔과 괴로움을 몰아내고, 사람을 즐겁고 기지에 넘치게 하는가 하면 대담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대담함과 기지와 즐거움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중국인은 유럽인보다 500년 정도 먼저 알아냈다.

현대의 브랜디와 위스키 오늘날 우리는 브랜디와 위스키 하면 서양의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된다.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며 뉴요커를 꿈꾸기도 하고, 꼬냑으로 대표되는 브랜디를 마시며 파리지앵을 꿈꾼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스키와 중국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증류주는 모두 중국에서 먼저 존재했었던 술이다. 그것은 'brandy' 의 어원인 네덜란드어의 'brandewijn(태운 포도주)와 중국에서 증류시킨 포도주, 즉 브랜디를 태운 술이라는 의미를 가진 ‘소주(燒酒)’ 라고 불렀던 것과의 일치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우산

중국의 우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산은 중국에서 4세기 말에 발명이 되었다. 이 이전에도 비단으로 만든 덮개 같은 것은 사용하였지만, 태양을 피하는 용도거나, 의식용 사륜차를 덮는 용도로 사용이 되었다. 위 왕조(386~532) 시기에 비단 대신에 나무껍질로 만든 기름종이를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우산이 등장하게 된다. ‘종이’ 라는 중국의 발명품이 있었기 때문에, 종이우산으로 비를 막는 다는 사고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때에도 비단우산은 사용이 되었지만, 의식에만 사용이 되는 황실의 전유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우산의 발명은 우산을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대중화 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서양의 우산 중국의 우산이 유럽에 전파 된 경위와 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종이를 가장 먼저 발명했던 중국의 종이우산이 유럽에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짐작해 볼 수 있다. 종이우산이라는 물건의 전파와 비 올 때 우산을 써서 비를 피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서양인들에게 중국의 종이우산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현대의 우산 요즈음에는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닐과 합성수지의 보급으로 종이우산을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2단, 3단우산이 등장하였고, 디자인적으로 뛰어난 악세서리적 우산까지 등장하였다. 이 모든 것은 중국의 종이우산이 없었더라면 등장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종이

중국의 종이 흔히 최초의 종이라 하면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떠올리지만, 파피루스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의 내피로 만든 것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종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이는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는 섬서성 서안 근교의 분묘에서 발견된 기원전 2세기 경의 것이다. 이 시대의 종이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져 상당히 거칠고 질겼기 때문에 의복, 포장, 칠기, 그리고 요즘의 휴지와 같은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종이로 옷을 만들었다고 하면 굉장히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중국인은 기원전 2세기부터 종이를 방한용 의복으로 사용해 왔다. 이 종이로 만든 의복들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강해 심지어는 군용 갑옷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총탄조차 이 갑옷을 뚫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8~9세기경 당나라 시인들은 종이에 글을 써서 그것을 여러 장 합쳐 책을 만드는데, 이것이 후에 인쇄술의 발명과 결합되면서 지식의 보급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대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분야의 기술 발전이 촉진되게 된다. 이후 1393년에는 중국 궁정에서 1만 5천 장의 종이 휴지를 만들었고, 이외에도 종이 접기, 우산, 지폐 등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서양에서의 종이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7세기에 인도로 전해졌고, 이것이 다시 아라비아를 거쳐 8세기경에 유럽으로 유입된다. 그러나 정작 그 제조법은 전해지지 않아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1세기까지 유럽에서 종이가 쓰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제지업은 13세기 무렵부터 번창하게 된다. 이는 중국이 종이를 발명한 지 무려 1500년 뒤의 일 이었다.

현대의 종이 인류는 제지법과 이후 발명된 인쇄술의 결합을 통해 눈부신 현대 과학 문명을 이룩했으며, 종이는 책, 신문, 잡지, 각종 문서 등 정보의 전달과 보존에 있어 여전히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종이는 중국인이 그것을 발명한 지 2천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중국의 칠 칠은 기원전 13세기부터 중국에서 사용되었다. 니덤은 칠을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공업용 플라스틱’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칠은 고무처럼 나무줄기에서 나오는 액체를 원료로 하며, 보존력, 강도 및 내구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부엌 용품부터 가구, 신발, 방패까지 여러 용도로 널리 쓰였다. 기원전 2세기에는 칠에 대한 중요한 화학적 발견을 했다. 그들은 증발로 칠이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칠 속에 게를 넣었는데 실제로 갑각류 조직에는 칠을 굳게 만드는 효소가 포함되어 있어 이 당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으나 후에는 게를 넣으면 칠이 못쓰게 된 사실을 알고 더 이상 게를 넣지 않았다. 칠의 영구적인 액화는 최초의 공업적 생화학에 모범을 제공했으며, 칠기는 중국인에게는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의 반려품이었다.

서양의 칠 유럽에서는 17세기에 동양 칠공예가 보급되어 유럽풍의 디자인을 가미해서 비슷한 것을 제작하기도 했다. 칠을 포함한 수지도료를 일반적으로 라커라 부르기 때문에 칠기를 라커 웨어(lacquer ware) 라고 한다. 18세기에는 매우 정교하게 모작이 행해져 프랑스의 마르탱 일가(Martin)에 의한 베르니 마르탱이 유명하고 금색을 사용한 로코코 풍의 디자인이 특이할 만 했다.

현대의 칠 현대에서 또한 칠을 한 칠기를 쓰고 있는 실정이다. 그 내구성과 보존성, 그리고 예술성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칠이라는 기술이 없었다면, 이 시대에 나무나, 천연섬유로 된 그릇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인쇄

중국의 인쇄 인쇄는 7세기부터 종이나 비단에 찍는 목판 인쇄로부터 시작되어서, 8세기부터 그 실례가 남아있다고 한다. 보다 이전에는 인장이 갖가지 물건의 표면에 이름을 찍는 데 쓰였고 한 번에 100자의 한자가 기록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최초의 완전한 인쇄본은 868년에 인쇄된 불교의 「금강경」이며 처음에는 불교나 도교의 탁본이 많이 인쇄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통 책, 개인용 달력 등도 많이 인쇄되어 인기를 끌었다. 인쇄의 전성기는 10세기로, 이 당시 어느 불교도 문집이 약 60만부 정도 대량으로 발행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대량의 인쇄가 가능한 것으로 보아 10세기 정도에는 목판본 인쇄산업이 확립되었고, 그 생산능력도 양적인 면에서는 현대에 필적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걸 추측해볼 수 있다. 다색 인쇄, 석판 인쇄 또한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 여러 인쇄술에서도 눈여겨볼 것은 활자판 인쇄이다. 활자판 인쇄는 중국의 전통적인 인쇄 형태로 미천한 평민이었던 필승에 의해서 발명되었는데, 이로부터 약 400년 뒤에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유럽에 전파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활자는 중국 역사에서 산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한국, 몽골 등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인쇄 서양에서는 1440년대 말기부터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주조해 인쇄했다고 전해진다. 1455년을 전후한 무렵에 찍어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등이 초기의 활자본으로 알려져 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책을 필사해서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의 책은 성경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인쇄는 일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물들이 나오면서 종교개혁과 같은 사회변혁을 불러오고, 문화적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맞게 되었다.

현대의 인쇄 근래에는 공업의 발달과 함께 인쇄 기술 또한 빠른 속도로 발전되고 있다. 좀 더 빠르고 선명한 색을 낼 수 있으면서도,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프린터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조작 기술도 단순해지고 있다. 중국에서부터 최초로 발명된 인쇄 기술은 종교뿐 아니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모든 문화들의 전파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누가 뭐래도 중국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무리

니덤의 난제 “중국 고대가 인류 과학 기술 발전에 크고 중요한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과학과 산업혁명은 서양의 과학에 추월당했는가?” 이 질문은 중국의 우수한 과학 기술을 연구하던 조셉 니덤에게 평생의 숙제였다. 니덤은 오랜 연구 끝에 자신의 질문에 대해 두 가지 답을 내렸다. 첫째, 중국이 상호 경쟁의 환경을 발전시키기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처음 통일을 실현한 후, 소위 “봉건 관료제도” 정부는 중앙집권성의 정책을 시행하였고, 극심한 중앙 집중 제도는 중국 사회가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했다. 이러한 정책들의 영향으로 당연히 기존의 기술 발전은커녕 신기술 개발도 어려웠다. 니덤은 중국의 지리적인 환경 또한 중국 과학의 정체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중국이 유럽, 미국과 같이 과학에 대해 개방적인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중국이 서양보다 먼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발명해냈을 것이고, 갈릴레이, 뉴턴 등과 같이 역사상으로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이 중국인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조는 이러한 니덤의 난제를 통해서 그 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과학 중에서도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발명품들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일상적인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을 통해 더욱 의미 있는 전시회를 만들어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