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문화학과 편입/기출문제
2011년도 기출문제
(A) 我们首先要问自己,为什么要谈软实力? 我认为中华民族的文化认同已经达到了一个更高境界。美国的政治纯粹是地方政治,很难跳出国家利益这个层面,但是中国民众对“天下”这个观念习以为常。假如现在中国要考虑中华民族的价值,当我们的利益与世界的利益发生矛盾有冲突时,我想很多人会把世界利益作为我们利益的基础。这种“天下”的观念是十分了不起、在西方非常少见的资源。像这种观念,还有仁义礼智信,这些都是儒家的核心价值观,他们虽然来自地方,但都得到人们普遍认可。因此,我有一个期待,就是把儒家的核心价值观发展成为亚洲价值,并建立起自己的核心价值,这样才有可能做到与西方的核心价值在平等互惠的基础上进行对话。而只要双方能坐下来对话,中间的交互影响就可能出现。
*참고 软实力: 소프트 파워
(B) 1990年代以来,民间性的文化保守主义思潮逐渐兴盛,这种思潮认为中国的传统文明,虽然在19世纪中叶以后面对西方世界的坚船利炮节节败退,但其精神层面的价值,自有其存在之意义,而在大国崛起的背景之下,传统文化如何为软实力缺乏所困扰的盛世中国,提供足够的文化资源和精神价值,更是进一步促发了为传统招魂的集体想象。兰州地方官员就很坦率地说了,以儒家文化为代表的华夏文明是我们提升文化“软实力”取之不尽的源泉。中国社科院文史哲学部副主任李景源说,国学热和儒学热不仅仅是一种学术现象和文化现象,而是构成中国发展道路的重要组成部分。一个儒家社会主义共和国简直呼之欲出了。体制正在系统性地收编儒教中国的游魂,当然这种收编自有其逻辑与法则。
1. (A)단락과 (B)단락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하시오.(40점)
2. 2011년 1월 11일, 천안문광장에 9.5미터 높이의 공자 동상이 중국 당국에 의해 세워졌다. 이를 (A)와 (B)의 저자는 각각 어떻게 평가할 것으로 예상되는지를 서술하고, 그 중 어느 쪽이 더 타당한 평가라고 생각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논하시오.
2012년도 기출문제
(가) 现在知识界对民主化的理解很片面,往往跟选举联系起来。选举从来跟民主没有直接关系。我认为民主更多的是指决策过程。我最近提出一个观点“主权在民,治权在贤”1),民众应该在决策的各个阶段都有参与,但是执行政策的人应该是有经验、有学识的。中国的干部选拔制度很重要的一条就是要有丰富的地方工作经验。 中国的民主化事实上一直在进行着。对比中、美两国的医疗体制改革,我认为中国的更加民主化。我正在研究中国五年规划的决策过程,包括如何搜集民意,如何汇总讨论,如何出台等。我的看法是决策过程中要更民主,但决策者要是贤者,这种贤者不是指传统意义上的精英,而是指拥有较高的理论素养和丰富实践经验的人。 以前费孝通先生讲“文化自觉和文化自信”,我现在讲“体制自觉和体制自信”,中国这套体制本身也变成我们文化的一部分了,但我们很多知识分子指责中国体制有问题。这个体制在一个超大型的国家运作这么多年,总体表现不错,里面一定有成功的地方、值得总结的地方。可是我们很多知识分子不承认,反而把发展过程中出现的一些正常问题视为体制的弊病,动辄指责体制,完全是因为不自觉,不自信。
*出台: 정식으로 공포하다 *动辄: 걸핏하면
(나) 在中国当下的语境下,国家主义(statism)从民族主义(nationalism)发展而来,但比民族主义更极端,更政治化,强调国家在社会生活各个领域的至高无上的核心地位,因为国家代表民族和人民的整体利益,可以抵御私人利益对政治过程的渗透和干扰。中国的国家主义并非传统的皇权专制主义或现代极权主义的翻版,它的正当性以人民主权论为号召,有某种似是而非的民意2)基础,通过民主而实现威权,乃是一种民粹式的威权主义。中国的国家主义在中国崛起的大背景下,力图证明自己是一种与西方不同的、具有中国特色的政治道路和政治模式,是足以挑战普世性的西方民主的制度创新,正在通过将人民利益与中华文明的神魅化,建立一种国家的拜物教。
*抵御: 제어하다 *极权主义: 전체주의 *民粹式: 포퓰리즘식 *普世性: 보편적
1) “主权在民,治权在贤”을 중심으로 (가)지문의 대의를 설명하시오.(25점)
2) “似是而非的民意”란 무엇을 의미하는가?(25점)
3) (가)지문의 저자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세계적 부상에 대해 어떠한 원인 분석 혹은 평가를 제시할지를 국가의 역할 및 중국의 특수성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추론하고, (나)지문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시오.(50점)
2013년도 기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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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学中源”论,并非薛福成独创,而是当时士林流行的一种文化理念,既有保守派,也有洋务派。但薛福成等洋务派以“礼失求诸野”的心态看待西学,就使得其“西学中源”论与保守派截然不同,成为联属中外、文化互补的理论桥梁和解读纽带,具有时代合理性。薛福成的日记正是以“西学中源”说为立论之基,在“考旧知新”中发现“新知”,引进“新知”,倡扬“新知”。他与其前后期的驻外使臣,以耳闻目睹的西洋、东洋经历,或浅或深、或温润或激越地书写异城新知,应时所需,扩大了中国士大夫阶层的文化视野,不同程度地更新和丰富了晚清知识谱系。在当时,文化的开放,新旧思想的转换,首先须先行于士大夫阶层。任何一个学说、观念,任何一部著作,没有士大夫阶层的喝彩和响应,便难以风行天下,更不可能领袖群伦。《出使日记》如果仅仅是“西学中源”论的诸多西洋景之考证,那便是老调重弹,并无多少新鲜之处。但若是仅仅贩运“西洋新知”,甚至言说“用夷变夏”,那只会遭到“聚诃丛骂”,难以施行,其流播也大打折扣。郭嵩焘日记之所以被奉旨毁板,原因即在此。只有将西洋新知融入“西学中源”视野之下,“迎合”士大夫阶层普遍的文化心态,在他们可接受的限度内诠释和介绍西洋文明和西洋新知。这样,才能缓解中西文化交融过程中的焦虑和对抗,使士大夫心理走向开放和成熟。薛福成《出使日记》之所以高出侪辈,于此,实乃其“独胜之秘”。
1. 밑줄 친 부분을 우리말로 풀이하세요.
2. 위 지문에 담긴 논지를 요약하시오.
2014년도 기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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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表达的观点,几乎完全来自于“中国的”话语环境之中,充满了对于“中国的”问题意识和争论的关切;以往也只在有关“中国的”发展及其周边环境问题的内部讨论中起了些作用。因此,远离这种话语环境的域外学者或从事规范理论研究的书斋学者,其实大可不必认真。 此外,对于在社会经济发展方面已经开始被西方主导的国际社会所接受、但却往往必然地被西方话语体系曲解的“中国经验”,我作为改革以来就参与了有关政策的试验研究、又有些英文表达能力的学者,不得不在应付越来越多的第三世界的另类国际交流中承担一些解释“中国特色”的义务,于是,其间也就难免伴随着不自觉地付出了一些重新构建多元论“世界观”的微小努力,也就逐渐形成了不同于西方中心主义一元论话语体系的、多少具有些逻辑解释力的另类思考。不过微乎其微罢了,切盼所有秉持一元论话语的人不在意我的唐突。
一、中国经验的另类解读
首先应该简述的,是我对于所谓“百年中国”的不同于西方意识形态的解读:自清朝末年以来,在被帝国主义列强侵略和周边地缘政治环境长期高度紧张的条件下,中国人所做的有重大历史意义的事情,无外乎是先后开展了四次代价极大的工业化建设——清朝末年以藉湘、淮两军崛起而坐大之地方势力为主的“复制翻版”式的洋务运动、民国时期战前短暂的民族主义工业化及利用战争机会形成的国家主义工业化、新中国的国家工业化原始积累和改革以来产业资本形成之后的高速度扩张。 无论朝代怎样更迭、政党如何演变,中国终于成为所有人口过亿的第三世界“原住民国家”之中唯一短期、全面地完成了工业化的国家。 其次,这种后发型工业化是在资源短缺、人口最多的大陆型国家里,又只能、且有条件靠内向型资本原始积累进入工业化;而其中最为关键的机制,就是以社会主义的名义和国家资本主义的实质来集中使用中国最丰富的劳动力资源、成功地替代了稀缺程度接近于零的资本要素、大规模投入于政府作为所有者的国家工业化所必须的大型基本建设。
其三,这种中国特色的工业化及其内向型资本原始积累进程中所形成的基本制度,必然与主要靠殖民主义对外扩张完成工业化的西方国家的自由主义制度完全不同——不可能靠某种革命来集中劳动力投入于国家基本建设的西方(除了奴隶制时代和殖民地奴役劳动之外),在劳动力分散条件下只能先有个体化的作坊手工业时代,再逐渐形成地域集中的“工场手工业”,然后,才能逐渐积累进入机器工业的资本。西方这个缓慢进入工业化的原始积累三阶段,与中国二十世纪五十年代初在战争压力下直接进入国家资本主义大工业建设的快速进程相比,虽然都属于资本主义所创造的人类文明,但由于两者形成的经济基础存在显著的异质性,当然会对上层建筑的不同起决定作用。
西方经济学教科书把要素的稀缺性作为市场经济发挥看不见的手的作用的前提条件,但那是指要素的“相对”稀缺。中国在1957年苏联作为“宗主国”突然停止投资之际,面对的最大困难是资本要素的“绝对”稀缺。而在这种外资投入为主的工业化进程中,一旦出现起主导作用的资本要素绝对稀缺,那些按照市场经济构建其经济基础和按照自由主义理念构建其上层建筑的发展中国家,一般都会出现工业化中断。
不仅如此,更为严峻的是:正是由于宗主国投资工业化期间,受援国通常会按照宗主国的要求来构建符合这种工业化经济基础的庞大上层建筑;那么,一旦这种上层建筑及其内涵教化功能的意识形态成为受援国的主流话语,就很难随投资中断、经济基础不得不改变的客观变化而主动地自我变革,往往因其内在利益结构固化而走向经济基础变革的反面!于是,大多数发展中国家可能会随宗主国撤资而发生社会动乱甚至人道主义灾难.这可能是那些同样以过剩的劳动力资源作为“比较优势”的一般发展中国家大部分至今没有完成工业化的主要原因之一。
既然其他发展中国家也都有劳动力资源丰富的比较优势,那么,这就不能成为解释中国经济高速增长的理由;亦即,中国具有的不是“这种比较优势”。 进一步看,中国之所以在宗主国撤资之后得以发挥“独立自主、自力更生、艰苦奋斗、勤俭建国”的方针,继续其以国家民族主义为实质、以通俗化的阶级斗争和理论上的继续革命为意识形态动员手段、有效地发动全体民众参与的“地方化(localization)”的工业化进程,并且用了比西方国家明显短得多的时间就完成了工业化,主要原因,可能在于其以“全民所有制”为名的资本原始积累方式不同。
此时期,反映在西方中心主义的意识形态上的典型说法,就是抹杀了个性的、极权主义的“人海战术”。而当代得以享受工业化成就的、在温饱需求“之上”追求或主张“西化”的中国人,虽然其西化主张本已百年高寿,无可厚非;但,难免有些也会把那个几乎整个中华民族都艰苦奉献的时代变为其内心的阴暗。 需要正视的基本事实是:中国从1957年前苏联停止投资之后,公开宣布第二个五年计划停止实施——苏联式的计划经济停止。由此,中国事实上已经不可能再按照斯大林模式搞中央政府的大规模工业化,遂于1958年开始推进以地方化的中小型企业为主的地方工业化——发动人民公社大办“五小工业”就是这种新战略的内容之一。 当时的领导集体都认同并且发出文件推进的“调动地方积极性”提出之后的地方政府大干快上,就出现了几乎没有任何工业化经验的遍地开花,这种“大跃进”式的工业建设,虽然无论在经济上还是政治上的代价都比中央政府接受苏联投资的工业化更大;但代价基本上不由政府承担。 我们中国人关于“比较优势”的理论研究缺憾在于:很少注意分析这种发展主义增长中形成的制度成本和收益的严重不对称;也几乎没有把发展中国家的广大民众事实上承担了国家工业化制度成本的实质作为政策研究的基本依据。
而我自从接触理论研究以来就一向认为:不同的原始积累方式导致不同的制度、形成不同的制度成本和收益,并且决定着后来以“改革”为名的制度变迁的路径依赖。 中华民国的奠基者孙中山倡导的三民主义“想象”(imagination)源于西方话语体系,在难以据此发动民众参与革命的困境中不得不演化为实质上的民族主义和利用帮会。二战之后新中国形成的同样源于西方的社会主义“想象”也演化为主要作为国家资本原始积累的动员工具。期间,发生了多次以这种“想象”为名的政治运动,实际上可大致归因于“宗主国”短期投资快速形成了斯大林模式的官僚主义部门叠加于革命战争期间从“土围子”演变而来的宗派主义的中国特色的混合型上层建筑,基本上不能适应宗主国撤资之后客观上不得不改变的经济基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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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도 기출문제
1. 아래 제시한 시(詩)를 낭송하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세요.
寒夜客來茶當酒, 竹爐湯沸火初紅
尋常一樣窓前月, 才有梅花便不同
2. 아래 제시된 글의 내용을 참고하여, 2014년 홍콩에서 이른바 ‘우산혁명’을 촉발시킨 ‘원인’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설명하고, 사태의 바람직한 해결 방향에 대한 자기 견해를 간략히 제시해 보시오.
강제 해산이 확실하다며 긴장이 고조되던 10월 5일 밤에도 주도 단체들은 우왕좌왕했다. 도심 점거도 원래 중국 국경절인 10월 1일로 계획했지만, 정부의 강경 대응에 갑자기 9월 28일로 앞당겨졌다. 학생과 시민들이 처음부터 도로 점거를 다들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이번 운동을 주도한 대학생회연합 ‘학련’, 중고등학생 단체 ‘학민사조’ 그리고 교수와 원로 목사가 이끄는 ‘센트럴 점령’ 외에도 많은 단체가 참여하고 있었지만, 곳곳에서 벌어지는 행동을 누가 하는 건지 서로 다 알지 못했다. 누가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는지, 누가 도로 위에 사당과 교회를 만들었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도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뛰어나와 도로를 2주일 이상 점령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대체 홍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번 사태에 대해 그 동안 언론에서는 주로 세 가지를 강조해왔다. 홍콩에서 직선과 민주주의가 가지는 중요성, 중국에 대한 반감이 터져 나왔다는 점, 젊은이들이 경제난으로 힘든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점, 즉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경제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맞지만, 반씩만 맞다. 첫째, 직접적 계기는 행정장관 선거 문제이다. 원래 2017년부터 직선으로 뽑기로 2007년 정해졌지만 구체적 방법이 마련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8월 중국 정부가, 별도의 지명위원회에서 뽑힌 후보들만 직선에 나올 수 있다고 결정했다. 완전 직선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높아지던 상황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홍콩인에게 민주주의가 원래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을까? 사실 영국식민지 시절 홍콩인은 자기 정부를 선출할 권리를 거의 가져본 적이 없다. 입법회(국회) 일부를 직선으로 뽑을 수 있게 된 것도 1990년대 와서였다. 중국 반환을 앞두고 마지막 총독 패튼은 직선 의석을 대폭 늘리고 선거연령을 낮추는 등의 개혁을 시도했고, 97년 반환을 앞둔 중국 정부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크게 반발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원래 갖고 있던 민주와 자유를 빼앗겼다’는 기억을 홍콩인에게 남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민주에 대한 열만이 커진 것 또한 사실이다.
둘째, 이들은 중국 정부에 반대하려고 길거리고 나왔는가? 최근 홍콩에서는 여러 사건으로 반중 감정이 커져왔다. 본토 여행객이 홍콩에서 분유를 잔뜩 사가서 팔고, 본토 임산부가 급증하여 산부인과 병상이 부족해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홍콩 남자들이 그 동안 본토에서 낳은 자녀 수만 명이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직후 몰려와 거주권을 달라고 요구할 때부터 홍콩인들은 경악했다. 가난하고 수준 낮은 중국인들이 몰려와 홍콩을 침몰시킬 거라는 두려움이 커졌다. 2003년 정부는 국가반역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입안하려다 50만 명의 항의시위로 실패하기도 했다 2003년 사스 후 어려워진 홍콩 경제를 돕고자 중국 정부는 본토인의 홍콩 여행 규제를 완화했고, 급증한 본토 여행객은 경제를 부활시켜 준 대신 많은 갈등을 낳았다. 2012년 홍콩 정부는 중국식 애국교육을 도입하려다 10만 여 명의 항의로 포기했다. 하지만 이런 반중 감정이 전부는 아니다. 반환 후 중국 정부에 대한 홍콩인의 신뢰도와 만족도는 크게 올라가기도 했다. 중국식 교육은 반대했지만, 중국에 대해 무조건 배우기 싫다는 건 아니었다. 본토인과 결혼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홍콩인들은 중국을 조국으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셋째, 젊은이들이 심각한 취업난과 주택난에 대한 불만으로 뛰쳐나온 것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앞날이 불투명한 청년세대가 깊은 좌절을 안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경제 때문이라면, 왜 그 불만이 ‘직선’에 대한 요구로 터져 나왔는지, 왜 젊은이들이 도로에서 불편하게 자면서도 웃고 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원래 홍콩에서 젊은이들은 사회정치문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이들이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중고등학생이 이끈 2012년 중국식 교육 반대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부두철거 반대 운동이다. 문제는 결코 ‘경제’만은 아니었다.